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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회 문건’을 둘러싼 논란이 요란하다. 청와대는 즉각 문건 내용의 신뢰성을 부인했다. 이른바 ‘찌라시’를 주워 모은 것에 불과해 애초에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는 식이다. 그 대신 어쨌거나 청와대 내부에서 작성된 문건이 신문사로 흘러 들어간 경위만큼은 철저히 밝힐 태세다. 문건 작성자인 박모 경정이나 전직 청와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청와대 내부에서 문건이 복사돼 유출됐을 가능성이 커졌다. 검찰이 그 행위자와 구체적 동기를 밝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듯하다.
▦ 반면 여론은 문건 내용에 은근한 믿음을 내비치고 있다. 오랫동안 떠돌던 소문과 들어맞는다는 게 주된 이유다. 문건이 청와대나 정씨 본인의 말대로 추가 조사나 확인을 거치지 않은 ‘찌라시 종합’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동어반복이야말로 서로 100% 일치하니까. 취재 능력이 호기심에 못 미친 탓인지, 아직 문건 내용의 진위를 가려줄 만한 후속보도는 나오지 못했다. ‘만만회(박지만 이재만 정윤회) 국정농단’ 의혹 제기로 ‘찌라시’에 힘을 보탠 야당조차 이번에는 아직 언론의 의혹 보도에 근거한 동어반복적 의혹 제기에 그치고 있다.
▦ 경험상 세계일보가 문건 내용 가운데 비교적 쉬웠을 정씨와 청와대 ‘문고리 권력’과의 만남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게 의문이다. 지금이야 ‘정치오염’이 증언의 신뢰성을 많이 떨어뜨린 상황이지만, 문건 공개 이전이라면 식당관계자들의 오염되지 않은 증언을 얻어낼 만했다. ‘~라고 한다’로 끝난 문장이 많아 지우기 힘들었던 신뢰성 의문을 더욱 짙게 했다. 즉각 확인된 문건 작성 사실 자체가 의미와 가치를 띠는 것도 실은 그 내용의 진위에 좌우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아쉽다.
▦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문건 유출을 국기문란, 공직기강 문란이라고 지적했다. ‘공직기강 문란’이야 당연한 얘기지만, ‘국기문란’은 복잡한 상념을 일깨운다. 사전적 의미는 ‘국가를 이루고 유지하는 데 기초가 되는 질서와 규범이 어지럽게 흐트러짐’이다. 우선 헌정 질서의 혼란을 떠올릴 수 있지만 이번 문건 파문과는 무관하다. 그 다음이 국정운영의 동요나 국민인식의 혼탁인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가를 결정하는 게 바로 문건 내용의 진위다. 섣부른 예단을 삼가고, 수사 결과와 후속 보도를 지켜봐야 할 일이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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