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아들을 둔 덕분에 1년 동안 수험생 아버지로 지냈다. 그래 봐야 회사 일 등으로 아들 챙겨줄 시간을 찾기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아들 역시 밤 늦게 와서 아침 일찍 나가니 서로 얼굴 맞대고 차분히 얘기할 기회가 별로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쳐 지나가듯 하면서 아들에게서 그리고 집사람에게서 주워들은 얘기들을 보면 철부지 같던 아들이 수험생 생활을 하면서 많이 어른스러워졌다는 느낌을 갖곤 했다.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정말 많이 노력해야 되겠다거나 게임에 빠진 친구를 어떻게 하면 PC방에 가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같이 고민해주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이런 교훈을 체득할 수 있다면 삭막한 고3 생활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 수험생들 사이에서 수능이 끝난 뒤 ‘뽀록터졌다’는 은어가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뜻하지 않게 운이 터졌다 정도의 뜻이라는데, 시험이 너무 쉽게 나오다 보니 그리 잘하지 못한 애들이 잘 보고, 잘하던 애들은 기대만큼 못 본 애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시험 잘 본 애들까지 뭐라 할 거는 아니지만, 열심히 했는데 노력의 대가를 얻지 못한 애들을 보면서 수험생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노력보다 더 중요한 건 운?’ 어떤 수험생은 인터뷰에서 “수능이 실력이 아니라 실수와 운을 테스트하는 것 같다”며 고개를 떨궜다. 한 문제만 틀려도 원하는 등급을 받지 못하는 시험, 단 한 문제 차이로 갈 수 있는 대학이 휙휙 달라지는 시험을 시험이라 할 수 있을까. 전 세계에서 가장 참혹한 고교 생활을 힘겹게 끝마친 학생들에게 이런 시험으로 마지막까지 좌절하게 하는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물수능’ 논란에다 유례없는 문제 오류로 온 나라가 난리다. 복수정답이 인정된 과목 중 하나인 생명과학Ⅱ의 문제 하나로 등급이 올라가는 학생과 내려가는 학생이 수천명이 되고, 이로 인해 수험생들은 어느 대학을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막막한 지경이 됐다. 막막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은 어찌할 수 없는 사이에 소중한 대학 진학의 꿈을 이미 빼앗겼을 지도 모른다. 등급이 올라간 학생은 성적이 올라 다행이다 싶겠지만, 복수정답으로 인정되기 전 가채점한 성적으로 일찌감치 수시를 포기했거나, 정시로 더 좋은 대학에 지원할 수 있음에도 낮은 대학에 수시로 지원했을 수 있다. 등급이 떨어진 학생들이 받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가채점한 성적으로 수시에 지원했다 뒤늦게 떨어진 등급으로 수능최저학력을 맞추지 못해 아예 대상에서 제외되는가 하면, 정시를 생각해 수시 기회는 포기했다가 졸지에 등급이 떨어져 결과적으로 정시도 수시도 모두 잃을 수 있다. 답이 하나가 아닌 둘인 문제를 내고, 다른 학생들과의 상대성적에 의해 등급이 가려지는 시험에서 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바닷속에서 죽어간 세월호의 학생들처럼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겠지, 이럴 것인가.
문제 오류를 단순 실수라고 넘어가더라고 더 근본적인 문제가 남는다. 쉬운 수능이다. 어떤 영어학원 원장은 이번 영어시험에서 지문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3초 만에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시중에는 영어지문은 해석본만 숙지시킨 뒤 답을 찾는 수험서가 날개 돋친 듯 팔렸는데, 이 책의 비법은 지문의 첫 문장과 중심문장을 한글로 해석해 놓고는 지문을 보자마자 3초 안에 내용을 ‘기억’나게 한다는 것이었다. 내용도 영어가 아닌 한글과 그림이 80%라고 한다. EBS와 연계한다는 명분으로 지문의 70% 이상을 EBS 교재와 똑같이 내다보니 이런 식으로 지문을 보지 않고도 문제를 풀 수 있는 ‘기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이 정도면 쉽다는 정도가 아니라 경악에 가까운 만행이다. 영어가 아닌 해석본으로 문제를 풀 수 있는 영어시험을 내는 이 나라 교육을 대체 어떻게 봐야 하나.
이런 식으로 문제를 낸다고 사교육이 줄어들거나 학벌 풍조가 근절되지 않는다. 그건 다른 문제다. 시험은 시험다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에게 편법과 대박을 좇는 신기루를 가르치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황유석 여론독자부장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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