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상한 일이 있을 때 나는 서점에 간다. 가까운 대형서점으로 향할 때도 있고, 컴퓨터 앞에 앉아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 접속할 때도 있다. 스마트폰의 서점 어플리케이션을 클릭하기도 한다. 새로 나온 책들의 표지를 일별하고 그 중 눈에 띄는 하나를 골라 무작정 책 소개 글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서점 방문은 충동구매로 이어지곤 한다. 나이 들어갈수록 필요한 물건 하나를 살 때마다 오래 벼르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는데 유독 책 앞에서만은 그렇지 않다. 서점에서 망설이는 순간은 옷가게에서보다 훨씬 짧다. 단골 오프라인 서점에 계속 가게 되는 이유는 오랜 시간 동안 구축해온 나만의 효율적인 동선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효율이란, 더 빠른 시간에 더 많은 책을 살펴보고 더 많은 책을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다는 의미다. 신간 소설로 시작해서 에세이를 돌고 만화를 거쳐 인문서와 사회과학을 차례로 지나 다시 문학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한 코너에서 한 권씩만 골라 담아도 손에 든 바구니가 금세 무거워진다.
루이스 버즈비의 노란 불빛의 서점은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다 웃다 했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 “나는 얼른 겨드랑이에 그 책을 꼈다. 구입 결정 완료.” 서점을 사랑하는 누군들 찔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버즈비는 책이 좋아서 서점에서 일하기로 마음먹고 고등학생 때부터 수차례 서점에 입사지원을 한 끝에 결국 서점 직원이 된 남자다. 그는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현실의 서점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 단언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책들 가운데 있고 싶다는 이유로 직접 서점엘 가기 때문이라는 거다.
내 견해도 비슷하다. 그리고 한 술 더 떠, 책들에 둘러싸인 기분이라면 온라인 서점에서도 만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 하나를 살펴보고 있으면 그 옆에 슬며시 ‘이 도서를 구입하신 다른 분이 산 책’ 목록 등이 뜬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직이게 되고, 그렇게 링크를 따라 부유하는 동안 현실의 온갖 사정은 까맣게 잊고 책들 속에 파묻히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책을 구입하고 가장 설레는 시간은 어쩌면 택배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급한 일이 없음에도 배달시간이 좀 늦어진다 싶으면 괜스레 초조해진다. 마침내 도착한 택배상자를 열고 책의 실물을 요모조모 확인하는 시간도 행복하다. 모니터 상에서 봤던 것보다 표지 디자인이 더 예쁘면 혼자 괜히 흐뭇해지고 예상보다 책이 얇으면 묘한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새 책은 서재의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다. 그러고 나서? 끝이다. 새로 꽂힌 책은 종종 잊힌다. 책을 사는 일과 책을 읽는 일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나는 자주 잊는다.
지난 11월 21일부터 도서정가제가 시행되었다. 그 하루 전 날, 주요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 구매자가 몰려들어 서버가 멈추기까지 했다. 인터넷 서점이 사재기 사태로 다운되다니, 초유의 사태라 아니할 수 없다. 나 역시 그 며칠 전에 책 할인 대란에 동참했다. 평소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박스 세트가 엄청나게 할인된 금액으로 나오자 구매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내 구매욕을 부추긴 일등 공신은, 며칠 뒤에 이 책의 가격이 대폭 오른다는 사실이었음을 고백한다. 그게 오르는 가격이 아니라 지금 이것이 내린 가격임을 알면서도, 그 작고 큰 차이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기에는 당장의 유혹이 너무 달콤했다.
도서정가제가 안 그래도 어려운 한국 도서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입 가진 자로써, 한 마디 거들려다가 나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11월 21일 이전 서버를 다운시킬 만큼 팔려나간 그 책들과, 그 책들이 담긴 택배상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언젠가 읽히리라는 꿈을 안고, 오직 그 꿈만을 안고, 목적지에 당도할 그 책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 언젠가는 언제가 될까? 책을 둘러싼 여러 가지 분분한 풍문들 속에서, 책은 다만 읽히기 위해 거기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부디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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