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세계박람회 당시 유달리 관람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람들이 있었다. 필리핀 루손섬 북부 산지에 사는 원시종족 이고로트족이 바로 그 주인공. 이들은 허리춤에 가느다란 천조각만 걸친 모습으로, 필리핀 현지를 본뜬 야외 전시장에서 생활했다. 특히, 이들은 인간을 사냥하고, 서양인들이 가장 친숙하게 느끼는 애완동물인 개를 먹는 부족으로 소개돼 야만적으로 비춰져 큰 관심을 받았다. 지나가는 관람객은 개고기를 먹는 이들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는 뉴욕타임스 AP통신 등 언론이 앞다퉈 소개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 루즈벨트도 다녀갔을 정도로 센세이션을 몰고 왔다. (세인트루이스 박람회는 전 세계 소수민족을 데려와 전시하는 ‘인간 동물원’을 설치해, 백인과 유색인의 차이를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고 한다.)
지난달 미국 영국 등 영어권 국가에 소개된 '코니섬의 사라진 부족(The lost tribe of Coney Island)'은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 지배할 당시 현지에서 데리고 온 이고로트족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야만성을 폭로한 책이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1905년 인간 동물원에 갇힌 원시 종족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파헤친 책”이라고 소개했다.
미국이 이고로트족을 데려온 건 필리핀을 점령한 스페인과 전쟁(1898~1901)에서 승리한 직후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 이들이 거주하는 본톡(Bontoc) 지역에 의무병으로 파견된 트루먼 헌트는 종전 후에도 현지에 머물며 부지사로 올라간 뒤, 필리핀 현지 미국 통치 정부의 내무장관 딘 우스터(동물학자)에게 이고로트족을 미국 본토로 데려가는 아이디어를 제안해 허락을 받았다. 정부는 1904년 150만 달러를 들여 이고로트족을 포함, 필리핀의 10여종족 1,300여명을 박람회가 열리는 세인트루이스로 데려온다. 순수 원시 종족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이 아직 스스로 통치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메시지를 주고, 필리핀에서 펼치는 미국 식민정책의 지지도를 높이려는 속셈이 근저에 깔려 있던 것이다.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때 큰 성공을 거두자 트루먼은 1905년 이고로트족을 뉴욕 남부 코니섬의 놀이공원인 ‘루나 파크’에 상설 ‘전시’한다. 그는 고아인 7세 아이부터 60대 노인까지 51명을 미국으로 데려왔다. 이들은 공개된 장소에서 생활해 일거수일투족이 그대로 노출됐다. 날마다 수천, 수만 명이 이들을 자세히 관찰(?)하러 몰려들었다. 관람객들은 거의 벌거벗은 채 노래 부르고, 춤추는 이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원래 이고로트족은 결혼이나 적을 물리쳐 승리한 특별한 경우에만 개고기를 먹지만, 코니섬에선 개고기를 거의 매일 먹어야만 했다. 또, 이고로트족 남자들은 적을 죽이고 머리를 모았지만, 인육을 먹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신 머리의 수만큼 가슴에 문신을 새겨 용맹함을 나타냈다.
관람객이 모두 돌아가는 자정이 되면 이들은 마을에 진흙과 지푸라기로 자신들이 지은 허름한 오두막에서 생활했다. 오두막 뒤에는 큰 감시탑이 있어 섬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트루먼은 이고로트족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노예처럼 부렸고, 그들의 임금마저 착취하는 악랄함을 보여줬다. 데일리메일은 “이고로트족 같은 ‘인간동물원’은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영국, 유럽에서 상당히 인기가 높은 일종의 엔터테인먼트였다”며 “열강이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면서 그 인기가 치솟았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 가디언 등 영미 언론에 글을 게재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저자 클레어 프렌티스는 책에서 “미국 의회도서관 필리핀 국립도서관 등을 찾아 다니며 트루먼 헌트에 의해 끌려온 이고로트족의 진실을 하나씩 들춰내면서 누가 정말 문명화하고, 누가 정말 야만적인지 생각하게 한다”고 썼다. 또, “이고로트족이 미국 역사에서 잊혀진 이유는 아마도 미국 역사와 미국-필리핀 관계에서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행동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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