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책 고르기와 읽기는 한마디로 단조롭다. 팩트가 많은 것을 제일로 치고 신착 도서에선 새 팩트가 무엇인지 찾는다. 무언가를 내려놓고 책에 빠져드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직업상 필요한 무언가를 찾으려 책을 본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회고록 ‘결정의 순간’도 그렇게 찾아 읽은 책이다. 대통령 회고록에는 당사자와 관련해 궁금했던 사안, 원래는 수십 년 지나야 공개될 민감한 내용, ‘카더라’식으로 이미 보도됐던 정보의 진위가 소개되게 마련이다. 공개 수위가 높지는 않지만 이 책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집권기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현대사가 집약돼 있다고 보면 된다. 퇴임 2년 만에 나온 책은 형편없는 그의 인기 탓에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회고록보다 많은 팩트와 미국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게 이 책이다. 그로선 실패한 대통령 평가를 뒤집기 위해서라도 많은 얘기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부시에 대한 한국 사회의 가벼운 평가 탓에 회고록을 펴 들기 어렵지만 막상 눈길을 주면 페이지를 쉽게 넘기기가 어렵다.
과거를 다룬 이 책이 아직 유효한 이유는 따로 있다. 버락 오바마 정부는 부시 정부의 화두였던 테러와의 전쟁, 이라크 전쟁, 금융위기 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과 관련해서도 빌 클린턴 정부가 막판에 물꼬를 튼 북미대화가 부시 정부들어 냉각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 전개이고 보면 지금의 오바마 정부와 미국을 이해하는데 부시의 회고록이 첩경인 것이다. 아무리 세계가 비판해도 끄덕이지 않는 미국의 견고한 보수논리가 무엇이고, 결과로만 알고 있는 미국의 정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실행되는지도 이 책에서 짐작할 수 있다. 감동이나 공감까지는 아니지만, 대통령이 내려야 하는 긴박한 결정의 순간들과 판단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수확이다. 오바마의 임기가 내년 말까지이니 그의 회고록은 적어도 2년은 기다려야 나온다. 그 때까지 부시의 회고록은 지금의 미국에 대한 가장 많은 사실을 적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부시가 자신의 공은 부풀리고 과는 줄인 것을 읽어내기 어려운 게 문제이긴 하다. 사실왜곡인 셈인데, 가령 그의 최대 실패작인 이라크 전쟁의 책임을 떠넘기는 장면은 예술에 가깝다. 부시와 함께 전쟁 결정에 참여한 콘돌리사 라이스 당시 국가안보보좌관, 콜린 파월 당시 국무장관, 딕 체니 당시 부통령, 조지 테닛 당시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각자의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이를 비교하면 비겁함의 정도를 알 수 있어 한편으로는 재미도 있다.
한국에서는 집권자나 정책결정자들의 회고록을 찾기 힘들지만 미국에선 그런 경험자들의 회고록 출간이 일반적이다. 베스트셀러가 되기 때문에, 전관예우가 드문 미국에서 전관들이 한 몫 잡는 것도 회고록을 낼 때다. 부시는 이 책 집필 전 저명 사학자 10여명을 만나 의견을 구했다. 그들의 한결 같은 대답은 대통령은 대통령직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직접 기록으로 남길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도 역사의 기록자가 돼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면 부시처럼 퇴임 뒤 오히려 인기가 올라갈 것이다.
이태규 기획취재부장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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