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른데, 누구 말이 맞는지는 직접 들어봐야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지난 24일 여중생과 동거하면서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40대 남성에 대해 대법원이 “사랑하는 사이였다”며 무죄 취지로 판결한 사건을 듣고, 한 법조계 관계자가 보인 반응이었다. ‘15세 소녀와의 성관계는 성폭행일 수밖에 없다’며 대법원의 판결을 비난하는 반응과는 괘가 다르지만 꽤 설득력 있는 지적이었다.
이번 사건을 두고 1심부터 대법원까지 각 법원이 내린 판단의 핵심 쟁점은 결국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중생과 서로 사랑했다는 피고인 가운데 누구 말이 진실인가였다. 대법원은 피고인의 말에, 하급심은 피해 학생의 말에 손을 들어주며 무죄와 유죄의 상반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1ㆍ2심은 피해자, 피고인의 법정 진술을 듣고 판결을 내리는 공개 재판인 반면 이런 과정이 없는 상고심은 기록만 보고 판단한다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1?2심에선 피해자, 피고인이 모두 법정에 나와 진술을 하고, 재판부는 그 말에 깔린 뉘앙스와 표정, 태도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며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은 대법원이 강조하고 있는 ‘서류가 아닌 법정에서 진실을 가리자는 공판중심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도 기록을 보고 눈으로만 판단하는 대법원이 ‘피해자의 말이 진실’이라며 1ㆍ2심의 판단을 뒤집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을 글로만 보고 내린 판결을 쉽게 수긍할 수 있을까.
이번 판결은 대법원이 법률심의 한계를 스스로 너무 쉽게 뛰어넘은 게 아닌지 의문이 들게 한다. 법률심은 하급심 판결에 헌법이나 법률 등 법의 위반이 있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누구 말이 맞는지에 대한 판단은 사실심인 하급심 재판부가 할 일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증거 채택을 잘못했다는 채증법칙 위반이나 심리가 부족했다는 심리미진을 이유로 들어 원심을 파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법원에서 사실관계가 바뀌는 경우가 많으니 2심에서 끝날 수 있는 사건도 대법원으로 몰린다.
대법원은 ‘과도한 상고 사건 부담’을 하소연하며 상고법원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 역시 법률심 한계를 넘나드는 대법원이 자초한 면이 없지 않다. 차라리 1ㆍ2심을 강화하고 대법원은 법률심에 충실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대법원이 상고법원 설치를 조속히 밀어붙이기 위해 의원입법을 추진하며 ‘국회의원 100여명 설득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풍문까지 나도는 지경이라면 대법원은 더 큰 것,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 여파가 다시 국민에게 미칠까 걱정이다.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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