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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세월을 견디는 것은 오직 인간뿐

입력
2014.11.2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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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들은 완강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햇살에 달구어진 돌 위로 이구아나 몇 마리가 졸듯이 앉아 있었다. 신전 너머로는 카리브해의 옥빛 바다가 넘실거렸다. 툴룸은 마야인들의 무역선이 정박하던 항구도시였다. 멕시코 대륙을 지배했던 마야 문명이 일구어낸 도시는 어느덧 폐허가 되어 파도소리에 닳고 있었다. 젊은 청년의 심장을 바치던 제단은 이제 돌무더기로나 남아 있을 뿐이었다. 스페인의 가톨릭 성지순례길 ‘카미노데산티아고’를 걷다 만난 대성당들은 텅 비어 있었다. 하늘을 뚫을 듯한 기세로 장엄하고 화려하게 솟구친 성당을 찾는 이는 마을의 노인들이 전부였다. 성당은 관광객들에게 받는 입장료로 겨우 유지해가고 있었다. 천국행 면죄부를 팔거나 예수의 이름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던 위세당당한 가톨릭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찬연하게 타오르던 영광과 권위를 잃어버리고 관광지가 되어버린 공간들이 지구에는 넘쳐났다. 수많은 문명이 일어났다가 주저앉은 자리에 변함없이 남은 것은 한 가지, 오직 인간뿐이었다. 사람의 삶만이 세월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이어지고 있었다. 쇠락한 문명의 흔적은 우리에게 증명한다. 한 시대를 지탱했던 상식과 믿음도 무너진 기둥 몇 개로만 남을 수 있음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세월이 흐른 후에 사라지고 말 것들이 없을까? 수만 명이 들어가는 거대한 교회, 서민이 평생을 일해도 살 수 없다는 고급 아파트. 이런 것들이 그렇게 되지 말라는 보장이 있을까. 그 웅장한 교회 안에 인간을 중심에 놓는 가르침이 없다면, 저 높은 아파트 안에 사람을 평등한 존재로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그 모든 것들 또한 폐허의 유적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며칠 전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을 위한 공청회장에 동성애 반대론자들이 난입해 공청회를 무산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입주민의 폭언을 견디다 못해 분신한 경비원이 일했던 압구정동 신현대 아파트에서는 경비원 전원에게 해고 예보를 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아파트의 이미지를 훼손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들과 입주자 대표회의의 그들은 인간의 동등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성적 정체성이나 직업에 따라 인간의 권리가 달라진다고 믿는 그들은 인권을 위해 인류가 걸어온 길을 자신도 모르게 부정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구나 존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우리는 피 흘리며 걸어왔다.

나는 여행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아파트 경비원의 딸이기도 하며, 몇 몇 동성애자의 가까운 벗이기도 하다. 생전의 내 아버지는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정년퇴임 후에 동네 아파트의 경비원으로 일했다. 늙은 아버지는 손바닥만 한 관리실에서 차분히 식사를 할 여유조차 없이 온갖 궂은일을 처리하며 묵묵히 일했을 것이다. 24시간 근무를 마친 후 아침에 집으로 돌아오던 아버지의 마른 등에는 피로가 가득 쌓여 있었다. 허드렛일을 하던 아버지였지만 우리 삼형제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며 정직하고 부지런히 살아온 훌륭한 어른이었다. 내 동성애자 친구 H는 자신의 일을 나무랄 데 없이 해내는 의학 분야의 전문가인 데다가 한 집안의 하나뿐인 귀한 아들이다. 군복무를 성실히 마쳤고, 빠짐없이 세금을 납부하며 살아간다. 경비원이나 동성애자에게도 고귀한 하루가 있고, 작은 꿈들이 있고, 소중한 가족이 있다.

지난 겨울에 머물렀던 발리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6개월 동안은 아이의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안아가며 키우는 전통이 있었다. 아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을 신성이 깃든 존재로 여기는 일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저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대접할 수는 없을까.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따라, 아파트의 평수나 사는 동네에 따라, 성적이나 출신지역에 따라, 온갖 이유를 다 붙여 사람을 차별하는 이런 나라에서 출산률이 1.3명이라도 되는 게 기적 같다. 10대에서 30대까지의 사망률 1위가 자살이고, 노인의 자살률은 OECD 1위라는 내 나라.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은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는 그 당연한 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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