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성폭행 사범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조선은 예를 중시했던 사회였지만 인간의 본능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성폭행 사건이 여럿 전해지고 있다. 성종 3년(1472) 4월 전 군수 황우형(黃友兄)이 한 밤중에 반씨(潘氏)의 방에 들어가서 강간하려다가 반씨의 어머니와 여종이 말리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그래서 강간 미수로 기소되었다. 조선은 대명률(大明律)에 따라서 성범죄를 처벌했는데, 여성이 정을 나누기를 원치 않는데도 강간했을 경우는 교형(絞刑ㆍ교수형)에 처하고, 강간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경우는 장(杖) 100대에 유형 3,000리에 처했다. 강간범은 사형이었고, 미수범도 중형이란 뜻이었다. 황우형은 강간 미수였지만 사헌부에서 이의를 제기했다. 반씨는 사족(士族) 부녀이고 황우형 부인의 4촌 오라버니의 아내인데도 강간하려 한 것은 동기가 불순하므로 미수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황우형은 사형은 겨우 면했지만 함경도 회령의 관노(官奴)로 떨어지고 말았다. 군수였다가 관노로 떨어졌으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법이 특이한 것은 범죄의 결과뿐만 아니라 그 동기도 엄하게 다스렸다는 점이다. 범죄의 동기를 ‘벨 주(誅)자’를 써서 주심(誅心)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춘추시대 노(魯)나라 선공(宣公) 2년(서기 전 607)에 조천(趙穿)이 진(晉)나라 영공(靈公)을 도원(桃園)에서 죽였는데, 당시 정권을 잡은 조순(趙盾)이 토벌하지 않았다. 또한 노나라 소공(昭公) 19년(서기 전 523)에 허(許)나라 도공(悼公)이 병중에 있을 적에 세자(世子) 도지(悼止)가 부왕의 약을 맛보지 않아서 도공이 죽은 적이 있었다. 이들이 직접 임금을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 동기가 불순하다고 해서 임금을 시해한 죄로 논죄해야 한다는 뜻에서 ‘주(誅)자’를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동기를 처벌하는 것을 주심지법(誅心之法)이라고 하는데, 공자가 쓴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이 이를 따른 것이다. 물론 동기가 좋은 뜻이면 정상참작이 되었다. 범죄의 결과보다 동기를 보는 주심(誅心) 처벌의 논리가 역경(易經)에 나오는 이상지점(履霜之漸)이었다. 서리를 밟으면 곧 얼음이 얼 때가 닥칠 것을 안다는 뜻으로 어떤 일의 징후를 보고 큰일을 미리 예방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명률(大明律) ‘형률(刑律)’의 ‘범간(犯奸)’ 조항은 강간뿐만 아니라 화간(和姦)도 처벌했다. 합의에 의해 성행위를 한 화간(和姦)은 장 80대인데, 여성에게 남편이 있으면 90대로 올라갔다. 조간도 처벌했는데, 조자는 조두(징의 일종)라는 뜻과 간사하다, 머리가 헝클어졌다는 뜻 등이 있었다. 대명률에 조간에 대한 형벌이 화간보다 무거운 100대였는데, 율학해이에는 ‘조는 조두(징)라는 뜻이니 음악으로 여성의 마음과 눈을 현혹시켜 간통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런데 음악으로 여성을 유혹한 것이 왜 화간보다 더 강하게 처벌을 받는 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율학해이에는 그렇게 풀이되어 있었다. 조간에 대해서 선조 6년(1573) 유희춘이 조강(朝講)에서 정확한 뜻을 풀이했다. 세종 때 중국 사신 예겸(倪謙)이 오자 세종이 성삼문(成三問)과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서 접대하게 했는데, 평소 조간의 뜻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성삼문이 예겸에게 “율문에 조간이라고 한 것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다. 예겸은 “간부(奸夫)가 간녀(奸女)를 남의 집에 데려다 두는 것을 뜻합니다”라고 답했다. 유희춘은 조는 곧 이끌다(引)는 뜻이고, 여성을 다른 집에 데려다 두는 것이므로 화간보다 더 무거운데 율학해이가 잘못 뜻풀이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린 아이를 강간하거나 꾀어서 성폭행했을 경우에는 더 강하게 처벌했다. ‘12세 이하 어린 여아를 강간했을 경우는 화간이라 하더라도 강간과 같이 논죄(和同强論)’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어린이 성폭행범은 예외 없이 교수형에 처했다. 개국 초인 태조 7년(1398) 윤5월 잉읍금(芿邑金)이 11세 여아를 강간했다가 교형(絞刑) 당했다. 세종 17년(1435) 강원도 철원의 사노(私奴) 문수생(文守生)도 11세 된 여아를 강간했다가 사형 당했다. 중종 18년(1523) 윤4월 해주(海州)의 죄수 이천산(李千山)이 아홉살 여아 검주리(檢注里)를 강간한 사건도 사형으로 다스렸다. 조선이 강간범을 사형으로 다스린 것은 여성의 정조를 목숨처럼 소중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어린 여아의 경우 아직 채 피지도 못한 꽃이었기에 더욱 강하게 처벌했던 것이다. 최근 대법원에서 15세 여중생과 관계를 맺은 연예기획사 대표에 대해 무죄를 선고해 논란이 이는 가운데, 전직 국회의장 및 검찰총장 성추행 사건, 제자들을 상습 성폭행한 국립대 교수 사건 등이 연일 불거지고 있다. 성범죄에 관대한 것은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일 뿐 우리 선조들의 법 정신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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