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 출신 영국서 간호사 활동
할례 후유증 임신부 보고 충격
82년 보고서로 실태 첫 폭로
반대운동 단체도 최초로 설립
세계보건기구서 6년간 활약
중동ㆍ아프리카 등 해당 국가에
FGM/C 금지하도록 설득
2001년 이후 민간단체서 헌신
한 세대 안에 근절 바랐지만...
국제사회 말론 반대하고 미온적
아프리카 주도 첫 근절운동 기구
에푸아 사망 직전에야 활동 시작
피렐리와 샤넬의 브랜드 모델로 80, 90년대 ‘엘르’ ‘보그’ 등 패션지 표지를 장식했던 소말리아 출신의 모델 와리스 디리(Waris Dirieㆍ49)가 자신의 상처를 세상에 공개한 게 1997년 ‘마리 끌레르’ 인터뷰에서였다. 세 살 때 ‘미드간(여성 할례시술자)’에게 클리토리스와 음순을 잘린 이야기, ‘성냥개비 머리만 한 구멍’만 남긴 채 질구를 봉합 당한 이야기, 자신은 살아남았으나 동생은 과다 출혈로 숨진 이야기….
‘사막의 꽃’으로 불리던 패션 스타의 저 고백은 아프리카와 중동 대다수 국가들이 종교와 전통의 이름으로 수천 년 동안 자행해온 끔찍한 가혹행위의 실상을 극적으로 폭로했다. 그는 이듬해(98년) 수기 ‘사막의 꽃(Desert Flower)’을 썼고, 2009년 셰리 호만 감독은 이디오피아의 모델 겸 배우 리야 케베테(Liya Cebete)를 주연으로 와리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 와리스는 유엔 아프리카 인권 특사, 아프리카연합(AU) 평화대사 등을 역임하며 여성 할례 근절과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일했다.
하지만 유엔과 국제 사회가 와리스의 저 고백을 충격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그 상처가 와리스만의 상처나 소말리아만의 관습이 아니고 덜 민주화한 대륙의 어두운 이면만도 아니라는 사실, 영국 미국 등 거의 전 세계 이민자 공동체 안에서도 은밀히 또 공공연히 자행돼온 일임을 아예 모르진 않았기 때문이다. 가나 출신의 한 영국인 간호사가 병원에서 한 아프리카 출신 임신부의 상처를 목격한 뒤 혼자 조사하고 연구해서 여성 할례의 실상 보고서를 처음 낸 게 1982년이었다. 그리고, 비록 만장일치였다고는 하지만, 유엔 총회가 여성 할례를 ‘인권 침해’로 규정한 것은 2012년에 와서였다. 믿기지 않을 일이지만, 지금도 매년 수만 명의 소녀가 종교와 전통, 문화적 특수성의 미명 하에 저 범죄에 희생되고 있다.
FGM/C(Female Genital Mutilation/Cutting)라 불리는 여성할례, 즉 여성기 훼손/절단의 실태를 처음 세상에 알리고 그 관행을 근절하기 위한 교육 조사 캠페인 외교 활동에 불을 지핀 영국인 간호사 에푸아 도케누(Efua Dorkenoo)가 10월 18일 별세했다. 향년 65세.
그는 82년 영국에서 FGM/C를 주제로 한 보고서를 발표했고, 캠페인으로 성금을 모아 83년 FGM/C 연구 및 반대운동을 위한 최초의 단체 ‘여성보건연구개선기금(Foundation for Women’s Health, Research and Development, FORWARD)을 설립했다. 그와 FORWARD의 활동은 2년 뒤인 85년 영국 정부의 ‘여성할례금지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1995~2001년 국제보건기구(WHO) 여성보건국 국장(대리)로 발탁돼 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 가나 카메룬 케냐 소말리아 수단 등 국가 보건당국을 비롯 유엔의 모든 회원국이 FGM/C를 금지하는 데 동의하도록 설득했다.
2007년 세계보건기구(WHO)는 FGM/C의 유형을 넷으로 분류했다. 음핵 전체 혹은 일부를 잘라내는 유형, 음핵과 음순 일부 혹은 전부를 잘라내는 유형, 외음부를 잘라낸 뒤 질구의 상당부분을 봉합하는 유형, 그 외 여성 외음부에 미용 등 목적으로 피어싱 하거나 문신을 새기는 등의 행위다. 처음 세 유형이 인권 유린에 해당된다. 그것은 육체의 일부를 훼손하는 데 그치는 일이 아니다.
FGM/C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수천 년을 이어오는 동안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합리화ㆍ정당화해 온 것은 분명하다. 아프리카와 중동, 인도네시아 등 상당수 국가와 부족은 지금도 여성 할례를 순결의 증표로 인식한다. 할례를 안 받은 여성은 창녀로 인식돼 결혼도 못하고 가족과 부족의 수치가 된다. 그래서 대개 15세 이전, 이르면 3~7살의 소녀들은 가족의 손에 이끌려 칼이나 나무가시 등으로 살점이 잘리고 뜯긴다. 곪거나 과다출혈로 숨지는 일도 잦고, 영구적 손상을 입어 임신과 출산을 못하거나 배뇨 등 장애를 겪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 ‘부수적’ 피해는 현황조차 파악된 바 없다.
국제 보건 인권기구와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은 도케누와 FORWARD의 선구적인 활동 덕에 80년대 중반 이후 비로소 활기를 띤다. 유니세프는 2013년 보고서에서 아프리카와 중동 29개 국가의 여성 약 1억2,500만 명이 FGM/C를 당했고, 약 3,000만 명의 소녀들이 지금 위험 속에 방치돼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80년대 이후 추세가 꺾인 것은 사실이다. 케냐 탄자니아 등 일부 국가의 경우 FGM/C가 범해지는 횟수는 30년 전에 비해 약 1/3로 감소했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이라크 라이베리아 나이지리아에서도 절반 정도로 줄었다. 유엔인구기금(UNFPA)과 유니세프는 2008년부터 아프리카 중부와 북부 22개국에서 FGM/C를 근절하기 위한 강력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각국 정부와 공동으로 여성 할례 금지를 법제화하고, 다각적인 인권 교육을 펼치고 있다. 행정 종교 지도자들과의 지속적인 협의로 ‘순결 전통’은 지키면서 할례를 대신할 만한 방안을 모색하는, 이를테면 문화적 절충점을 찾기도 한다. 그 결과 2014년 기준으로 15개 국가의 약 1만2,000여개 부락(약 1,000만 명)이,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FGM/C를 안 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는 지난 해보다 약 2,000개 부락이 늘어난 수치다. 유니세프 보고서는 FGM/C에 대한 인식도 점차 전향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스스로는 FGM/C가 악습임을 알면서도 “강력한 사회적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딸들에게 FGM/C를 당하도록 하는”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도케누는 1949년 9월 6일 가나의 케이프 코스트에서 태어났다. 여고 학생회장을 지낸 그는 양호교사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고교를 졸업한 66년 17살에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난다. 위생 및 열대의학을 전공했고, 대학을 나온 뒤 빈민의료시설인 ‘로열 프리(Royal Free)’ 등 여러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그는 70년대 말 한 병원에서 한 임신부가 질구 봉합 후유증으로 출산에 실패하는 일을 겪고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의사도 병원도 그 문제를 문제삼지 않는 현실이었다. 그는 런던의 인권단체 ‘소수자 인권그룹(Minority Rights Group)’ 회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고, 학업을 재개해 82년 석사학위를 땄다. 그의 논문은 FGM/C를 다룬 사실상 첫 논문이었다. 94년 발간한 그의 책 역시 FGM/C 관련 최초의 전문서로, 2002년 짐바브웨에서 열린 국제북페어 조직위원회가 국제 심사위원단을 통해 선정한 ‘20세기 아프리카(출신 작가가 쓴) 최고의 책 100권’에 꼽히기도 했다.
도케누에게 WHO에서 일한 6년(1995~2001)의 경험은 다양한 전문가들을 만나고 실질적 연대의 네트워크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됐지만, 거대 조직 특유의 관료주의와 더디고 조심스러운 절차 등 불만족스러운 면도 있었던 듯하다. 그는 2001년 WHO를 떠나 여성인권 국제민간단체인 ‘EQUITY NOW’에 합류, FGM 피해자의 생생한 증언들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 인권범죄에 드리운 문화적 종교적 허울을 적극적으로 폭로한다. 그는 정책당국과의 협의나 미디어 홍보활동을 벌일 때마다 피해 증언자들과 함께 다니며 국제 여론을 환기하는데 주력했다. 도케누는 2000년 미국의 저명 페미니스트인 글로리아 스타이넘(80)과 함께 ‘EQUITY NOW’의 평생공로상을 수상했고, 앞서 94년에는 대영제국훈장(OBE)을 받았다.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 적지 않은 도덕적 정치적 빚을 지고 있는 영국 정부는 지난해 FGM/C 근절을 위한 아프리카 펀드를 조성했고, 도케누는 그 펀드로 출범한 아프리카인 주도의 사실상 첫 FGM 근절운동 기구인 ‘The girl Generation: Together to End FGM’의 실행 감독을 맡았다. 그는 케냐 나이지리아 부르키나파소 등지에서 연대 활동을 추진해왔다. 이 기구(http://www.thegirlgeneration.org)의 공식 활동은 에푸아가 숨지기 일주일 전인 지난 10월 10일 시작됐다.
BBC는 2013년 국제사회의 정치 노동 등 분야에서 성 차별을 극복하는데 헌신한 첫 ‘여성 100인’으로 도케누를 선정하면서 그에게 ‘FGM의 전사(Warrier)’라는 타이틀을 부여했다. 그 타이틀처럼 도케누는 종교와 문화 권력, 남성 권력에 편승해온 불의와 국제사회의 위선에 맞서 전사처럼 싸웠다. 그는 국제 개발현안 연대 매체인 ‘Devox’와의 인터뷰에서 “만일 해당 국가와 국제사회가 의지를 갖고 나선다면, 우리는 한 세대 안에 FGM을 근절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지금까지, 또 아직도 관련 국가와 국제 사회가 저 잔혹한 행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는 말로만 반대하고 글로만 그럴싸하게 성토하는 정치인들의 이중적 행태와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의 더디고 미온적인 개입에 분노했다. 그의 조국 영국 역시, 85년 선도적으로 금지법을 제정하기는 했지만, 또 연간 100여 건의 FGM관련 합병증 사례가 보고되고 있지만, 올해에야 금지법 관련 피의자의 첫 기소가 이뤄졌다. 캐머런 영국 총리는 연초 런던에서 열린 FGM종식 국제회의 연설에서 “내 생애 안에 그 행위가 근절되기를 바란다”고 천명했지만, 그 역시 도케누가 첫 보고서를 낸 지 32년 만이었다. 도케누는 법은 최소한의 당위라고 믿었다.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그는 “금지법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건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법에만 의지할 경우 기소를 면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저지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전사로서의 그의 존재가 어떤 국가나 집단에게는 못마땅했을 것이다. 가디언 인터뷰에서 그는 “나의 공개적인 발언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샐먼 루시디에 못지않은 도발로 받아들여졌고 또 실제로 나를 살해하려 한다는 말을 전해 들은 적도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반면에 아프리카의 여성들, 특히 FGM/C의 피해자들에게 그는 ‘Mama Efua’로 통했다. 7살에 FGM을 당하고 현재 The Girl Generation에서 일하고 있는 지부티 출신의 님코 알리는 “도케누는 (마치 엄마처럼) 유쾌하고 지혜로우면서 언제나 우리의 말을 끈기 있게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우리도 아프리카의 여성들과 ‘엄마와 딸’같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해왔다”고 BBC 인터뷰에서 말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뉴요커에 보낸 이메일 서신에서 “(도케누)는 희망과 변화의 기적”이라며 애도했다.
갈 길은 아직 멀다. 유니세프의 2013년 보고서 ‘What might the future hold?’는 지역별 인구증가율을 감안할 때 2050년이면 전 세계의 신생아 중 여아의 31%(하루 평균 5만7,000명)가 FGM/C가 자행되는 아프리카와 중동 29개국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즉 지금 관행이 존속될 경우 피해자가 현재의 연간 360만 명에서 660만 명으로 늘어날 거라는 의미다. 그리고 지난 30년간의 FGM/C 감소 추세를 감안하더라도 지금보다 많은 410만명이 매년 FGM/C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FGM/C 관행의 가장 악명 높은 국가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의 경우 여성 인구의 91%가 FGM을 받았고, 와리스 디리의 조국 소말리아 역시 98%의 소녀들이 희생되고 있다. 지부티(93%) 말리(89%) 수단(88%) 기니(97%) 시에라리온(90%) 에리트리아(83%)….
유니세프 보고서가 전하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국제 사회가 더 관심을 쏟고 더 힘껏 싸우고 설득해서, 도케누의 희망처럼 한 세대 안에, 아니 더 빨리 FGM/C를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님코 알리는 뉴요커 인터뷰에서 아이작 뉴턴의 표현을 빌려 “그녀는 거인이었고, 우리는 지금 그녀의 어깨 위에 서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 ‘우리’는 국제 사회의 모든 활동가와 그 노력으로 악몽을 모면했거나 모면하게 될 모든 여성들을 포괄하는 우리일 것이다. 그리고 여성의 몸에서 태어난 전 인류일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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