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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신문,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서평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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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신문,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서평 게재

입력
2014.11.27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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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 일본어판 표지.
제국의 위안부 일본어판 표지.

지난해 국내에서 출간돼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소까지 당한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일본 아사히신문이 27일자 조간에 이례적으로 긴 서평을 실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책은 번역돼 최근 일본어판이 출간됐다.

서평을 쓴 사람은 일본 소설가이자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대 교수인 다카하시 겐이치로(高橋源一郞). 글은 오피니언 페이지에 해당하는 ‘논단시평’에 메인으로 실렸다. 모양새는 ‘제국의 위안부’를 ‘일한 역사인식문제란 무엇인가’(기무라 간 지음) ‘과거는 죽지 않는다’(테사 모리스스즈키)와 함께 독후 감상의 형태로 정리한 것이지만 내용의 대부분이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평가다. ‘고독한 책…기억의 주인이 되기 위해’라는 제목의 서평 중 ‘제국의 위안부’ 관련 부분을 번역해 소개한다.

지난해 한국에서 출판돼 “전 위안부 분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제소ㆍ고소당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일본어판이 드디어 출간됐다. 감명 받았다고 쓰기도 망설여질 정도로 준엄함으로 가득한 이 책은 이후로 쓰여질 모든 ‘위안부’에 관한 말에서, 공감하든 반발하든 부동의 항성처럼 흔들리지 않는 기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이 정도까지 고독한 책을 읽은 적이 없다고 느꼈다. 아니 이 정도까지 고독한 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저자의 마음을 생각하며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 심각한, 회복불가능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균열을 만들어냈다. 한쪽에는 “위안부는 단순한 매춘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위안부들은 강제로 끌려온 성노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국가의 책임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거듭해왔다.

박유하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위안부들은 경험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제각각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들어왔다. 그것은 위안부문제를 부정해온 사람에게도, 위안부들을 지원해온 사람들에게도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양한 상황을 말한 증언 가운데에서 각각 갖고 있던 대일본제국의 이미지에 맞춰 위안부들의 ‘기억’을 취사선택해온 것이다.”

박유하가 하려고 한 것은 위안부들 한사람 한사람의 다양하고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었다. 거기서 박유하가 귀에 담아낸 이야기는 우리들이 지금까지 들은 적이 없는 것이었다.

박유하는 ‘조선인 위안부’들을 전장에 끌고 간 ‘책임’과 ‘죄’의 주체는 제국일본이라면서, 동시에 실제로 그들을 끌고 간 조선인 동포업자와 그것을 허락한 ‘여자의 인생을 지배 아래 두는 가부장제’(일본인의 경우도 같다)를 강하게 비판한다.

‘사죄’해야 하는 것은 제국일본뿐만이 아니라 “한국(또 북한)에도 위안부들에게 ‘사죄’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잊혀졌다. 왜일까. 식민지에서 살았던 사람은 때로는 본국민보다도 더 열렬히 그 종주국에 사랑과 충성과 협력을 맹세했다. 그것이 설령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리고 그것은 잊혀져야 하는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위안부’의 대체물로서 전장에 보내진 ‘조선인 위안부’에게 일본인 병사는 때로 (몸과 마음을 유린하는)치떨리는 증오의 대상이고, 때로는 (똑같이 전장에서 ‘물건’으로 취급 받는)동지일 수도 있었다. 그 모순을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됐던 그들의 진실한 목소리는 일본과 한국 어느 쪽의 공적인 ‘기억’에서도 불편한 존재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노예’는 성적 혹사 이외의 경험과 기억을 은폐해버리는 말이다. 위안부들이 총체적인 피해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측면만 주목해서 ‘피해자’로서 기억 이외를 은폐하는 것은 위안부의 전인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된다. 그것은 위안부들에게서 스스로 기억의 ‘주인’이 될 권리를 빼앗는 것이기도 하다. 타자가 바라는 기억만을 가지게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종속을 강제하는 것이 된다.”

과거 자신의 몸과 마음의 ‘주인’인 것을 허락 받지 못했던 위안부들은 지금은 자기자신의 ‘기억’의 주인인 것을 거부당하고 있다. 그 비애가 박유하의 책을 깊은 고독의 색깔로 물들이고 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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