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차 타이어도 한번 바꿔야 하지 않겠어?” 이런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아들과 밖으로 돌던 아빠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날씨가 뒷받침될 때의 이야기다. 쌀쌀해지면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고민 하나가 새로 생겼다. 아파트 층간소음 문제다.
돌 전에 걷기 시작한 아들은 요즘 뛰어다닌다. 급할 것 없지만 어디로 움직이든 뛰어서 이동한다. 최근엔 그림책의 개구리를 따라 ‘폴짝폴짝’하느라 여념이 없다. 뛰어 다니는 게 최고의 놀이인, 딱 그 시절에 접어들었다.
메추리알 같은 발뒤축이 살짝 떴다가 바닥으로 떨어질 때 이 아빠의 가슴은 출렁거린다. 10㎏ 남짓한 애가 뛰면 얼마나 뛴다고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느냐, 할 수 있지만 쓰라린 경험이 있다. 몇 년 전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하던 날 이야기다.
짐을 옮기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 말을 가장 먼저 붙인 아파트 주민은 앞집 아주머니가 아니라 윗집 아줌마였다. 덩치 큰 가구들 자리 잡느라 한창 어수선할 때 한 아줌마가 휙 들어왔는데, 그의 첫 마디는?“이 집 이사 나갔어요?”였다. ‘안녕하세요’도 아니고 자기가 누구라고 밝힌 것도 아니고 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최대한 밝은 얼굴로 “네, 그분들 오전에 나가시고 우리가 들어오는 겁니다”라고 답했다. 윗집에서 왔다는 사실은 ‘…실례지만 뉘신지…’하고 내가 물은 뒤에야 안 내용이다. 더 이상의 이야기 없이 금세 헤어졌던 터라 잊고 지냈는데, 그 황당했던 인사의 의미를 우리는 보름 정도 지난 뒤에서야 알게 됐다.
이사 후 보름이 지났을 즈음 나는 처음으로 윗집 초인종을 눌렀다. “저기… 밤늦게 죄송한데요, 새로 이사 온 아랫집입니다.” 10시 가까이 된 시간이었다. 문이 열리자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두 아들(네 살, 일곱 살 정도)이 야심한 시간에 찾아온 이웃에 호기심을 보였다. “애들이 너무 뛰는 거 같아서요. 이사 떡도 못 돌리고 이렇게 찾아와 송구합니다.” “네, 애들이 오늘따라 늦게까지 안 자고 노네요. 그런데 애 없으시죠? 애들 있는 집은 다 이래요. 이해 좀 해주세요.”
사실 천장이 쿵쾅거린 건 이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휴일 아침엔 아이들 뛰는 소리에 ‘놀라서’ 깼고, 저녁엔 TV 뉴스에 집중 못 할 지경이었다. 오죽했으면 휴일 낮엔 집 밖의 극장, 찜질방, 커피숍에서 휴식을 취했을까. 집에 누워 있으면 윗집 아이들이 TV 앞에서 뛰다가 큰방 침대서 뛰어 내리고, 부엌에 있는 엄마한테 매달렸다가 거실에 있는 아빠한테 달려가 안기는 모습이 그려질 정도로 그 소음은 공감각적이었다. 윗집 애들이 잠들고 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도 잠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사 후 열흘 가까이 우리도 집안 보수하느라 적잖게 이웃에 소음을 줬으리라 생각하며 참고 있던 터였다.
최대한 환한 얼굴로 정중하게 이야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줌마는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이해를 해달라’는 말만 귀에 맴돌았다. 아내가 더 화를 냈다. “이사 오던 날 윗집 아줌마가 그랬던 이유가 다 있었네!” 전에 살던 사람들도 우리처럼 이렇게 층간굉음에 시달렸고, 미안하다고 생각할 줄 모르는 그 아줌마랑 관계가 틀어졌으며, 천장과 바닥을 공유한 이웃이었으면서도 인사도 없이 이사를 나간 것이었다!
향(向)도 좋고, 층도 좋고, 교통도 좋고, 공원 마트도 가깝고…. 흠 잡을 데 없는 아파트가 시세보다 싸게 나온 이유가 바로 이거였구나 싶었다. 이사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윗집 때문에 다시 이사를 할 수는 없었다. 해가 바뀌고 임신한 아내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7년 만에 가진 애 또 유산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위층 아줌마가 소음의 실체를 알 수 있도록 알려주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거나 좀 더 조심할 수 있도록, 심하다고 판단될 때마다 계속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무가내였다. ‘애들 한번 키워 봐라’며 문을 닫았고 ‘우리 애들 때문에 나도 괴롭다.?그만 괴롭히라’며 울고불고 고함을 질렀다. 대화가 안 됐다. 폭발 직전까지 간 이 아빠는 경찰까지 불러놓고 이야기 한번 하려고 했지만 윗집은 우리 고충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경찰 출동 두어 달 뒤 윗집이 이사를 나갔다. 예전 주인이 윗집에 인사를 하지 않고 나간 것처럼, 윗집은 아랫집에게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계속된 이 아빠의 항의에 시달리다 못해 나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심했나, 이웃인데 좀 더 참을 걸 그랬나, 같이 식사라도 한번 하면서 더 좋게좋게 이야기 할 걸 그랬나…, 이런 저런 생각에 스스로 괴로웠다. 그 즈음 한 부동산에서 소식 하나를 들었다. “그 집 애들 좋은 학교 보낸다며 이사 갔잖아.” 이 아빠 때문에 이사 나간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의 숨까지 내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들이 뛰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생각난다. 같은 아파트 1층으로 이사했다는 친구, 집 전체에 쿠션을 깔았다는 동료, 서울 생활 접고 마당 있는 시골집으로 이사했다는 어떤 형…. 여기에 이름도 모르는 그 윗집 아줌마도 생각난다. 쌀쌀맞게 굴었던 내 모습도 떠오른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