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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돈 없어 들어왔다가… 골목 르네상스 주인공 됐어요"

입력
2014.11.2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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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번잡한 도심과 대조를 이루는 오래된 동네. 그 지역 토박이들이 아니면 아는 이조차 별로 없었던 골목길이 독특한 개성을 지닌 트렌드의 발상지로 거듭나고 있다.

골목길 변신의 동력은 청년 창업가들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다양한 기호에 부응하는 2030 소자본 창업가들의 개성 강한 외식업소들이 골목길의 변화를 이끈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골목길’을 ‘미니 자본과 다양한 문화의 자생지’이자 ‘골목길 순례자들을 끌어 모으는 새로운 문화생태계’로 표현하며 내년 소비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로 꼽았다.

소비트렌드의 중심에 선 젊은 골목길 창업가들을 만났다. ‘인구론’(인문계 졸업생의 90%는 논다), ‘돌취생’(입사 후 다시 취업준비생으로 돌아온 사람) 등 암울한 신조어까지 등장하는 열악한 취업환경을 이겨낸 이들은 점포 운영은 물론 만만치 않은 창업 스트레스마저 즐길 줄 아는 공통점이 있었다. 명예퇴직 등에 따른 비자발적 창업이 대부분이던 과거 경향에서 벗어나 창업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이 시대 젊은 CEO들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이태리 상회'의 박병진(왼쪽), 양형석씨
'이태리 상회'의 박병진(왼쪽), 양형석씨

돈 아닌 행복을 찾는다

서울 관악구 청룡1길 25. 김치찌개 전문점 ‘백채’는 인근 지하철역에서 도보로 10분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빈 자리가 나기만을 기다리며 가게 밖에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여관 밑 허름한 술집이 깔끔한 김치찌개집으로 변모한 건 불과 1년여 전. 어느새 26.44㎡(8평) 남짓한 작은 공간은 이 골목에서는 드물게 블로거까지 즐겨 찾는 맛집으로 떠올랐다.

변화를 이끈 것은 대학 동기생 박병진(28), 양형석(27)씨. 자산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사회 초년생이었던 박씨와 학사장교로 제대한 양씨는 지난해 “재미있고 행복한 일을 찾아” 의기투합했다. “가게는 살아있는 생물체니까 작은 변화만 줘도 긍정적인 고객 반응으로 돌아와서 일상이 재미있고 행복해요.”(양형석) “2년 전의 저는 이런 길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어요. 저를 포함한 요즘 젊은이들은 직접 몸으로 부딪치기 전에 막연한 두려움부터 품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통장잔고가 0원이 되어도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나이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해 보자고 마음 먹었죠.”(박병진)

재미를 좇았더니 돈은 저절로 따라왔다. 당연히 손님이 없어 초조해하던 때도 있었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양씨는 “손님이 없어 받는 스트레스는 결국 다른 손님에게 전달되게 돼 있다”고 강조했다. “메뉴에 적는 문구 하나, 음식을 담는 그릇이라도 바꾸는 데 시간을 쏟자면 걱정하고 있을 틈이 없을 만큼 바쁘다”는 것이다. 물론 ‘당일 재료로 김치찌개 하나만 정성으로 만든다’는 음식에 대한 철학은 언젠가 고객에게 전해질 것으로 믿었다.

6개월 전에는 김치찌개집과 대각선으로 마주한 자리에 ‘이태리 상회’라는 작은 피자집도 추가로 열었다. 이들은 약 4,500만원을 투자해 작은 김치찌개집을 연 것을 시작으로 1년여 만에 2개의 가게에서 연 매출 5억원 정도를 기대할 수 있을 정도로 사업을 키웠다. 프랜차이즈 사업도 시작해 조만간 ‘백채’라는 이름의 김치찌개 전문점이 서울 사당역 인근과 인천 논현동에 새로 문을 연다.

이들은 “돈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빨리 자리잡을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수익부터 챙기려 했다면 번화한 강남역이나 종로부터 떠올렸겠죠. 하지만 겉모습이 화려한 가게일수록 초기 투자비만 많이 들고 본인이 주도적으로 운영하기 힘들어요.”(양형석) “내가 있는 이곳이 언젠가 ‘봉리단길’(봉천동+경리단길)이 될 수도 있잖아요, 하하”(박병진)

삼청동도 부럽지 않다

젊은 창업자들이 골목상권을 선택하는 주된 이유는 자금 동원력이 크지 않아서다. 일각에서는 점차 상업화되는 서울 삼청동, 경리단길 등의 예를 들어 젊은 상인의 개성 강한 가게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ㆍ낙후 지역에 새 집단이 이주해 지역이 다시 활성화되는 현상)을 가속화시키며 원주민을 다른 곳으로 밀려나게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물론 그런 면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본래 목적은 자기 발전과 지역 차별화를 통한 상생이다. 최근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쓰이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원래 의미도 ‘임대료 낮고 저평가된 지역에 외부인이 들어와 지역발전 효과와 함께 정체된 지역 내의 편의시설 활성화를 유도한다’는 긍정적인 뜻을 담고 있다.

서울 관악구 쑥고개로21길의 커피전문점 ‘난다커피’를 운영하는 김하나(27)씨는 “차분하고 조용한 골목의 분위기가 내 가게를 더 돋보이게 한다”고 말했다. “큰 돈이 없어 골목에 들어왔지만 만약 자본이 충분했어도 이 골목을 선택했을 거예요. 이 가게가 번화한 동네에 놓였을 때의 느낌과, 여기처럼 생각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접하는 인상은 아마 다를 거예요. 오히려 카페의 개성 덕분에 이 동네가 달리 보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김씨가 지난 8월 39.66㎡(12평) 규모의 이 커피전문점을 연 것은 한국사회의 조직문화에 회의를 느껴서였다. 안정적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철저한 상명하복의 조직생활에서는 큰 성취감을 찾을 수 없었다.

아직은 매월 은행 대출이자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지만 다행히 매출은 꾸준히 오름세다. 김씨는 반경 수백 미터 내에 경쟁자가 많은 커피전문점 밀집 지역에서 일하면서도 이 역시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인다. “일종의 커피 클러스터가 형성되면 이곳이 삼청동 못지 않은 명소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시장 포화 우려가 높은 커피전문점을 열면서도 김씨는 창업 준비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커피전문점은 다양한 대중의 기호가 구체화되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커피전문점이 대동소이해 보일지 몰라도 조금씩 다른 주인의 기호가 드러나게 마련이고 같은 취향의 손님들이 틀림없이 찾아올 거라고 믿었죠.”

그는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어도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웠던 직장인 시절과 달리 지금의 행복감이 크다고 했다. “커피가 소비를 넘어 문화가 됐듯이 커피를 매개로 사회 어두운 부분을 밝히는 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커피 수익을 기부하고 청소년들에게 바리스타의 길도 열어주는 비영리 사단법인을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보틀컴퍼니'의 이문희씨
'보틀컴퍼니'의 이문희씨

고객과의 교감에서 행복을 찾는다

서울 송파구 신천역 먹자골목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위치한 ‘보틀 컴퍼니’를 운영하는 이문희(28)씨는 본래 생계형 창업자였다. 평생 장사를 해 온 어머니 대신 생계를 꾸리기로 결정하면서 132.23㎡(40평) 규모의 점포를 덜컥 얻어 2011년 봄부터 ‘맥주창고 컨테이너’라는 이름으로 창고형 맥주전문점을 운영해 왔다.

엉겁결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맥주전문점 사업이 그에게 천직 같다. 공부에 흥미를 못 느끼고 어려서부터 연기학원, 요리학원 등을 기웃거리며 진로를 좀처럼 확정할 수 없었던 그가 유일하게 진득하게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점포 리뉴얼과 함께 상호를 보틀 컴퍼니로 바꿔 사업에도 변화를 줬다. 한창때 월 4,500만원까지 올렸던 매출이 월 2,000만원대까지 떨어진 게 큰 이유지만 단순히 수입 병맥주를 파는 일에서 벗어나 맥주 시음 이벤트 등 다양한 맥주 관련 콘텐츠를 선보이고 싶어서다. “고객과의 교감이 좋아 차츰 일에 빠져들었다”는 그다.

“제가 심혈을 기울여 고른 맥주를 손님에게 추천했을 때 공감을 얻는 게 제게는 엄청난 희열이었어요. 돌이켜 보면 매출이 최고조였던 때도 그런 제 기쁨이 가장 컸던 시기였죠. 그래서 아예 매장을 단순히 맥주를 파는 공간이 아닌 소비자의 맥주 취향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보자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거죠.”

그는 사업을 하면서 새로운 인생 목표도 생겼다. 최근 맥주 소매업이 활기를 띠고 있지만 국내 맥주 제조업의 수준은 이를 못 따라가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국내외 소비자 모두에게 인정 받는 수제맥주를 만들고 싶다. 이를 위해 독서 모임도 결성했다.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위해서는 제조뿐 아니라 브랜드화 작업도 중요하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모여 경제ㆍ경영 관련 서적을 읽고 토론한다. 얼마 전에는 LG그룹과 GS그룹의 반세기 동업 역사를 풀어낸 ‘구씨 이야기 허씨 이야기’를 인상 깊게 읽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소규모 독립 양조장의 개성 강한 맥주가 예능 프로그램 소재로까지 활용되고 있어요. 콘텐츠로서 또는 사업아이템으로서 맥주가 지닌 잠재적 가치는 무궁무진한 것 같아요. 아마 그런 잠재력이 어려서부터 사업에 뛰어든 제 경험과 만나 앞으로도 좋은 시너지가 나겠죠?”

'도쿄면옥' 공동 창업자 정명준(왼쪽), 최도영씨
'도쿄면옥' 공동 창업자 정명준(왼쪽), 최도영씨

취업이 전부는 아니다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진 한국사회 현실에서 청년들에게 외식 창업은 노력만큼 보상 받는 매력적인 진로다. 지난 9월부터 서울 여의도의 한 증권빌딩 지하에서 일본식 면요리 전문점 ‘도쿄면옥’을 운영하는 정명준(27), 최도영(27)씨가 창업 전선에 뛰어든 이유도 취업으로 인생의 꿈을 한정하고 싶지 않아서다. “대기업 부장이 꿈인 인생은 싫었어요. 물론 대기업의 부장 정도만 되어도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에 속하고 돈도 많이 벌겠죠. 하지만 인생의 꿈을 그렇게 한정하는 것은 멋이 없잖아요. 그래서 취업이 아닌 창업으로 눈을 돌렸어요.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겠다는 생각에서요.”(정명준)

일찌감치 창업에 뜻을 둔 덕에 어려서부터 돈을 열심히 모았다. 정씨의 경우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고 호주로 떠나 1년6개월 간 주말도 없이 일하며 6,000만원을 모았다. 올해 초 귀국 후에는 여의도의 한 도시락집에 취직해 4개월 간 요리와 경영을 익혔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업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항상 노력하고 꾸준히 연구 개발에 매진해야 하는 점은 창업의 고충이자 매력”이라는 게 정씨의 말이다.

“창업은 남들이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그 점이 또 청년의 도전 정신을 자극하기도 하죠. 하루 평균 60그릇 정도 팔려나가는 요즘 매출을 보면서 벌써부터 다른 외식 아이템을 궁리하고, 프랜차이즈 사업까지 상상하며 꿈 꾸게 하는 힘, 그게 바로 청년들이 외식 창업에 뛰어드는 이유가 아닐까요.”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박나연인턴기자(경희대 호텔관광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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