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열대가 그리울 만한 아침이었다. 늘 그랬듯 ‘입시 한파’는 갑자기 닥쳤다. 서울 오전 기온이 영하 3도까지 떨어졌다. 철새처럼 남쪽 어느 해변으로 날아간 지난 13일은 한국 졸업반 고교생 대부분의 심리적 체온이 연중 최저일 게 분명한 대학수학능력시험 날이었다.
빽빽한 마천루林을 조감하다
도래지까지의 비행에 걸린 시간은 반나절 남짓.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에서 차로 다시 30분 가량을 달려 숙소인 ‘마리나 베이 샌즈’(MBS)에 닿았다. 돌이켜보면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절벽 너머로 끝없이 떨어지는 듯한 물길과 하늘을 파고든 빽빽한 마천루 숲.
세 개의 타워가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배에서 내려다 본 호반의 싱가포르 금융가는 ‘레고’ 블록으로 만든 도시 같았다. 초대형 여객기 넉 대를 넣어도 넉넉한 풀에 바글대는 세계 각지의 인종들 중 정작 헤엄치는 이가 몇 안 됐던 건 저 초현실이 워낙 압도적이어서였을 터.
야외 수영장 ‘인피니티 풀’은 호텔 57층 꼭대기에 조성된 고도 200m 스카이 파크의 일부다.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 있노라면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조각배나 다름 없다. 공원 전체는 343m로 파리 에펠탑을 눕혀 놓고 견줘도 20m가 남는 길이다. 받침대 없이 돌출된 끝 부분은 전망대로 쓰인다. 불야성인 도심의 밤 풍광은 더 장관이다. 스카이파크 내 나이트 클럽 ‘쿠데타’에 자리를 잡으면 발 아래 야경을 안주로 싱가포르산 맥주 ‘타이거’를 맛보는 호사도 누릴 수 있다. 현지의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현란하게 흥을 돋는 불빛들은 싱가포르에 자리잡은 글로벌 금융사들의 야근 현장이다.
모든 길, 카지노로 통하지만
MBS는 기획 단계부터 싱가포르 정부가 전략적으로 추진한 야심작이다. 두 장의 트럼프 카드가 기대어 하나의 기둥을 만들고 다시 기둥 셋이 모여 스카이파크를 받들고 있다. 배를 형상화한 공원과 독특한 건축 모양새로 싱가포르의 ‘랜드마크’가 됐다.
MBS는 여의도 면적 3분의 1 규모의 부지에 카지노를 중심으로 호텔과 컨벤션 센터, 박물관, 영화관, 야외 공연장, 레스토랑, 쇼핑몰 등이 몰려 있는 복합 리조트다. 카지노가 공간의 중심이 되어 어디서든 여행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규모로 꾸며졌다. 리조트 매출의 9할 가까이가 전체 면적의 1할에도 못 미치는 카지노에서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카지노의 역할은 마중물이라고 샌즈그룹은 설명한다.
실제 샌즈그룹 목표는 대단위 복합 리조트 개발 전문기업이다. 도박 대신 컨벤션이나 오락, 쇼핑 사업으로 더 큰 이익을 창출하겠단 게 그룹의 장기 포부다. ‘카지노 대부’인 셸던 아델슨(81) 회장은 미국 도박타운 라스베이거스를 컨벤션 시티로 바꾼 주역이기도 하다.
하기야 사람이 가는 곳에 돈도 따라가는 법. 내놓고 부도덕한 카지노를 마냥 주력으로 삼기도 부담스러운 데다 소수 관광객에게서 큰돈을 뜯기보다 박리다매를 노리는 편이 실리와 명분 면에서 리조트와 싱가포르 정부 양측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리조트 곳곳에 예술가 손길
카지노의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리조트 곳곳에서 유명 미술가들의 손길이 담긴 작품으로 마음을 치유해 볼 수도 있다. 리조트 측이 자랑하는 아트패스에 설치된 예술 컬렉션은 모셰 사프디가 설계한 놀라운 건축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중국 도예 거장 총빈 쳉의 ‘떠오르는 숲’(실제 나무가 자라고 있는 3m 높이의 도자기 화분)과 영국 출신 작가 안토니 곰리의 ‘표류’(로비 허공에 안개처럼 매달린 철사 소재 작품) 등도 인상적이지만 다른 작품들과 따로 ‘모셔온’ ‘하늘 거울’이 가장 눈길을 끈다.
호텔과 ‘예술과학 박물관’(아트사이언스 뮤지엄) 사이에 설치된 이 오목 거울 느낌의 스테인리스 스틸 작품은 주변 공간을 거울 안에 끌어 들인다. 빈 공간이 되레 무한한 공간감의 원천이 되는 셈. 인도 출신 영국 미술가 아니쉬 카푸어는 국내에도 팬이 많은 거장이다. 다양하고 줄기찬 문화 경험도 리조트는 여행객들에게 제공한다. 예술과학 박물관의 상설ㆍ기획 전시가 대표적이다. 살바도르 달리와 앤디 워홀, 빈센트 반 고흐 등 20세기 거장들의 작품이 이미 이 박물관을 거쳐갔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품들이 내년 5월까지 공개된다. 다양한 관광객이 찾아오는 국제도시에 걸맞게 전시작품의 선정도 엄격하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탁월성은 기본이다.
리조트 곳곳을 돌아 다니다 다시 스카이파크에 올라 보석처럼 빛나는 빌딩의 불빛에 젖어 든다.
전망대에서 화려한 불빛에 낭만적 시선을 보내는 것도 잠시. 천상을 찌르는 자동차 경적과 오토바이 소음에 다시 도시 속 이방인임을 깨닫는다.
대체 도시의 인력(引力)은 얼마나 강한 것인가. 기껏 살던 도시를 떠나 쉬겠다 간 곳이 다시 이국의 도심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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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경기 침체 빠지자 리조트 본격 유치… 오락ㆍ도박 산업 번창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뒤 초대 총리 리콴유의 리더십을 토대로 승승장구해 오던 싱가포르가 위기를 맞은 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다. 외국인 관광객 증가세가 주춤하면서 경기도 침체에 빠졌다. 새 성장동력이 필요했다. 타개책으로 제시된 게 리조트 건립이었다.
리센룽 총리는 2004년 취임 직후 복합 리조트 유치 사업 추진 계획을 천명했다. 문제는 카지노였다. 줄곧 정부가 유지해 온 도박 근절 기조를 뒤집어 엎는 모험이었기 때문. “가난한 어촌 국가로 되돌아갈 셈이냐”는 설득과 더불어 힘을 발휘한 게 ‘스필 오버’ 논리다.
싱가포르 정부는 거래를 시도했다. 객실 규모를 감축하면 카지노 과세율을 낮춰 주겠다는 거였는데, 리조트가 몰고 올 여행객들을 다른 숙박업소들이 나눠 수용하면 주변 상권도 덩달아 활성화하지 않겠냔 발상에서 비롯된 제안이었다. 샌즈 측은 공생 방안을 받아 들였다.
이런 선택의 이면엔 자국민만 배불리 먹으면 되고 그럴 수 있단 가부장제 민족국가의 자신감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다. 국민에겐 금욕할 것을 철저히 훈육하는 반면 이방인을 상대로는 거꾸로 오락ㆍ소비는 물론 도박까지 조장하는 게 싱가포르 정부의 배타적 이중 행태다.
하지만 달리 보면 싱가포르뿐 아니다. 노골적이든 은밀하든 온갖 방법을 동원, 이방인한테 돈을 쓰도록 하는 게 관광 산업의 정작이다. 모국 이웃을 위해 내는 세금엔 인색한 부자가 타국에 가선 돈을 흔쾌히 쓰는 걸 보면 재분배에도 세계화가 필요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거리낄 것 없는 건 여행객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여행은 일탈이다. 출발ㆍ종착지 모두 욕망이다. 어쩌면 작정한 잠깐 사치가, 타국에서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에게 일자리를 주고 아이들에겐 예술 경험을 주는 자선일 수 있다 생각하면 한결 맘이 편하잖을까.
싱가포르=권경성기자 ficci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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