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ㆍ법관 출신 50대 남성 일색
사회의 다양한 요구와 거리 먼 대법원
대법관 다양화와 더불어 증원도 필요
20년 전 사회부 법조팀에서 대법원을 담당할 때 일이다. 법원행정처 고위관계자와 독대한 자리에서 여성 법조인의 폭발적인 증가가 화제에 올랐다. 1994년은 사법시험 여성 합격자 비율이 처음으로 10%를 돌파하고, 여성 법관 수가 50명을 넘어선 해였다. 이 관계자는 개탄하듯 말했다. “사법시험이 너무 쉬워지고 한해 200~300명씩이나 뽑다 보니 여자들이 너무 많이 와요.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인데…” 당시 전 언론사 법조팀을 통틀어 유일했던 여기자 앞에서 이런 얘기를 거리낌없이 내뱉는 무신경보다 더 불편했던 건 말머리마다 접두사마냥 붙던 “우리가 보기엔…” “우리 같은 사람은…”이란 표현이었다. ‘우리’란 경기고-서울대 법대 출신 법관 패밀리를 뜻했다. 몇 해 뒤 그는 예상대로 대법관에 올랐고, 퇴임 후 역시 예상대로 대형 로펌으로 직행해 전관변호사가 됐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법조계의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40%를 넘나드는 사시 여성 합격자, 30%에 육박한 여성 판사 비율 따위는 더 이상 뉴스거리가 아니다. 사시-사법연수원 시스템을 대체할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이 도입됐고, 재조와 재야의 벽을 허물고 전체 법조 경력자들 가운데 판ㆍ검사를 임용하는 법조일원화도 전면 시행을 앞두고 있다. 국민참여재판도 점차 확대되고 있고, 전관예우의 폐해도 과거보다는 많이 줄었다.
그런데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여전히 낮고, 바닥을 알 수 없게 추락하는 까닭은 뭘까.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 3년만 놓고 보면 법원의 보수화ㆍ획일화가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사법신뢰를 높이는 데 재판의 결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공정한 절차의 보장이고, 그러려면 사회의 다양한 가치와 요구가 반영될 수 있도록 법원의 구성부터 다양화해야 한다. 법조일원화의 취지도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유독 대법관만은 지난 20년을 뚝 잘라 이어 붙인 듯 ‘서울대 법대를 나온 법관 출신 50대 남성’이 절대다수다. 성형외과 의사들 손을 거쳐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성형미인을 일컫는 ‘의란성 쌍둥이’에 빗대, 엇비슷한 경험과 사고를 가진 대법관들을 ‘법란성 쌍둥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을 듯하다.
최근 사회적 관심이 쏠린 일련의 대법원 판결에 대해 개인의 권리구제나 사회적 약자 보호보다는 국가의 권한을 확대하고 가진 자들의 이해를 대변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런 현실이 대법원의 절대적 영향 아래 놓인 하급법원의 판결, 대법관을 꿈꾸는 대다수 판사들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는 새삼 물을 필요도 없다.
최근 국회에서 대법관 14명 중 절반인 7명은 판사 출신이 아닌 법조인으로 임명하도록 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국회의원 절반에 가까운 146명이 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다. 대법원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어 대법원이 추진 중인 상고법원 도입을 전제로 대법관 중 최소 3명은 외부에서 영입하는 이른바 ‘빅딜’설이 흘러나왔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를 부인하면서 “대법관이 될 만한 분을 모셔야 하는데 어떻게 숫자를 못 박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일견 타당한 지적이다. 법에 외부인사 숫자를 못 박기보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고, 다양화를 제대로 하려면 법조인만이 아니라 법학 교수나 인권 전문가 등으로 풀을 넓혀야 한다고 본다.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도대체 “대법관 될 만한 분”이 누구냐는 것이다. 국회 개정안에 대해 “대법원장의 인사권 침해”라는 등 대법원이 내놓는 반대 이유들의 행간에는 “판결문 한 번 안 써본 사람들이 무슨 재판(그것도 최종심!)을 하느냐”는 항변이 숨어 있다. 상고법원 문제도 마찬가지다. 현재 구조로는 한해 3만5,000여건에 달하는 상고심 사건 처리도 버거운 게 사실이다. 그래서 다양화와 더불어 대법관을 늘리자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대법원의 그간 논의 과정을 보면 사법서비스의 질을 높여 국민의 재판 받을 권리를 보장하려 고심한 흔적은 보이지 않고 사건 처리에 골몰하는 행정편의주의만 두드러진다.
대법원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빅딜의 성사로 대법관 다양화가 일부 이뤄진다 해도 최종 후보에 오를 ‘대법관 될 만한 분’의 면면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사법개혁 논의를 대법원 또는 외부 인사가 참여한다지만 대법원이 구성부터 운영까지 사실상 주도해 온 사법정책자문위원회에만 맡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희정 논설위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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