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 관계·교수 대중적 이미지 탓, 상습 추행 공론화 못한 채 감춰져
"대학 진상조사에 소극적" 비판… 피해자들, 비대위 결성 엄벌 촉구
성추행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서울대 교수에게 비슷한 피해를 당했으나 침묵하고 있던 학생들이 공개적인 집단행동에 나섰다. 진상조사에 소극적인 대학도 비판의 표적이 됐다.
서울대 수리과학부 강모(53) 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학생 22명은 피해 사례를 수집, 비상대책위원회 ‘피해자 X’를 결성했다고 26일 밝혔다. 피해자 X는 강 교수가 학생들을 수학에서 종속변수를 뜻하는 ‘X’처럼 다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비대위는 성추행 추가 피해자가 있다는 보도(본보 11일자 12면) 직후 피해 사실을 알려온 학생들이 급증하면서 결성됐다. 당시 추가 피해자라고 밝힌 서울대생 A씨는 ‘을의 입장이라 지금껏 신고를 하지 못했는데, 용기를 내 강 교수의 상습적인 행동을 밝히자. 피해 증언, 증거를 모아달라’는 글을 학내 게시판에 올렸다. 학생들은 ‘학교 명예가 실추되더라도 밝힐 것은 밝혀야 한다’며 강 교수에 대한 엄벌과 대학의 후속 조치를 요구했다.
피해 학생들이 11일부터 사흘간 온라인 등을 통해 사례를 모은 결과 강 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진술한 사람은 22명에 달했다. 피해 학생 진술을 종합하면 강 교수의 성추행은 무려 10년에 걸쳐 일어났다. 피해 학생들은 학부, 대학원, 동아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강 교수와 얽혀 있었다.
비대위에 따르면 강 교수는 “앞으로는 소수 정예하고만 놀겠다. 이를 판단하는 기준은 누가 먼저 연락하느냐는 것이다” 등 메시지를 보내 학생들에게 연락을 강요했다. 학생들이 휴대폰 번호를 변경하면 강 교수는 주변 학생을 탐문해서라도 연락을 계속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밖에도 ▦끈질긴 저녁 식사 제안 ▦식사 자리에 나온 학생을 이성으로 대하며 신체 접촉 시도 ▦이후 연구실로 따로 불러 성추행 ▦학생이 반발하면 교수의 지위를 이용한 협박 등의 공통점이 확인됐다.
10년에 걸친 부당 행위가 지속되었는데도 피해구제는커녕 문제제기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도제시스템과 폐쇄적인 학문 풍토로 대학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교수와 학생 간 ‘갑을 관계’ 때문이다. 비대위는 “직장은 이직이라는 선택지가 존재하지만 대학은 마음대로 옮길 수 없다”며 “취업에 반영되는 학점은 교수의 권한이고, 대학원이라도 진학하면 교수의 손에 평생 운명이 맡겨지게 되므로 교수에 대항하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걸어야 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비대위는 또 “강 교수가 학생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는 교수인 것처럼 구축한 대외 이미지도 범행의 공론화를 어렵게 만들었다”며 “면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축구를 좋아하는 신세대 교수의 모습은 학생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비대위는 서울대 인권센터의 소극적인 대응도 질타했다. 인권센터가 피해자 실명 신고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는 보복이 두려워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피해자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태도라는 것이다. 한 학생은 “추가 피해자들의 증언이 나온 지 2주가 지났지만 인권센터는 강 교수를 불러 조사도 하지 않았다”며 “인권센터가 더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인권센터 관계자는 “실명 신고가 없어도 사안이 심각하면 센터가 직권조사를 할 수 있다”며 “현재 익명으로 들어온 제보 등 자료를 검토하고 있고 조만간 해당 교수를 불러 조사할 계획”이라고 해명했다. 한국일보는 반론을 듣기 위해 강 교수에게 수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장재진기자 blanc@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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