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와 청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두고 대치하고 있을 때 중요한 변수가 되었던 것이 ‘홍이포(紅夷砲)’였다. 홍의포(紅衣砲)라고도 하는데, 청나라의 정사인 청사고(淸史稿)는 서양포(西洋?)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청사고 천명(天命) 11년(1626ㆍ조선 인조 4년) 정월조는 청나라가 영원(寧遠)을 공략할 때 명나라 장수 원숭환(袁崇煥) 등이 “성 위에서 서양포를 방사해서 사졸이 자못 많이 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는 결국 태종 천총(天聰) 5년(1631) 홍의대포(紅衣大砲) 주조에 성공함으로써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붉은 오랑캐’란 뜻의 홍이(紅夷)란 어디일까?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明史) 외국열전에 나오는 화란(和蘭)으로서 곧 네덜란드를 뜻한다. 명사(明史)는 이들이 가져온 포를 성벽에 대고 쏘았더니 석성(石城)이 파열되면서 그 여진이 십리까지 울렸다면서 이를 “세상에서 칭하기를 ‘홍이포(紅夷?)’라고 불렀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에서 홍이포를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임금이 북벌군주 효종이다. 우리는 효종 4년(1653) 제주도에 표착(漂着ㆍ표류하다 도착함)했던 하멜(Hamel)은 잘 알고 있지만 그보다 26년 전인 인조 5년(1627) 경주(慶州) 부근에 표착했던 박연(朴淵ㆍ朴延)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둘은 모두 네덜란드인들이었다. 하멜표류기(漂流記)에 의하면 박연은 네덜란드 북부 리프(Rijp) 지방 출신으로서 본명은 얀 얀세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ㆍ1595∼?)였다. 그는 서른두 살 때 중국의 아모이 인근에서 정크선(船)인 우베르케르크(Ouwerkerk)호를 타고 대만으로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경주 부근으로 표착했다. 조선은 외국인들이 표류해 올 경우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인도주의 정책을 갖고 있었으므로 벨테브레도 본인이 원하는 일본의 나가사키(長岐)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대접왜인사례(接待倭人事例) 등의 기록에 따르면 동래 왜관(倭館)에서 일본의 표류인이 아니라고 거부하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 벨테브레는 디레크 히아이베르쓰(Direk Gijsbertz), 얀 피에테르츠(Jan Pieterz)와 함께 표착했는데, 조선에서는 3인의 서양인을 조사한 후 화포 제작에 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훈련도감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박연을 항복한 일본인인 항왜(降倭)와 표한인(漂漢人)으로 만든 부대의 책임자로 삼았다. 이들 3인의 서양인 중 두 명은 병자호란(1636) 때 청나라와 싸우다 전사하고 박연만이 살아남았다. 우리는 병자호란 때 전사한 이 두 명의 서양인에 대해서 최소한 기억만이라도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조선 후기의 문신 석재(碩齋) 윤행임(尹行恁ㆍ1762~1801)은 외국의 일과 조선에 왔던 외국인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윤행임의 문집 석재집(碩齋稿) 9권이 ‘해동외사(海東外史)’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중 ‘박연(朴延)’에 대해서 쓴 글을 보면 박연의 처음 이름이 호탄만(胡呑萬)이고 아란타(阿蘭陀ㆍ화란) 사람인데, 일명 홍이(紅夷)라고 쓰고 있다. 윤행임은 박연이“병서(兵書)에 정통하고 화포(火?)를 잘 만들었는데 아주 정교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윤행임은 병자호란 때 순절한 삼학사 중 한 명인 윤집(尹集)의 5대손이었다. 증조부 윤홍이 송시열의 문인이 되면서 노론(老論) 당색을 띄게 되었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時派)에 가담하면서 인생이 격변에 휩싸였다. 윤행임은 요직인 이조참의와 홍문관 제학을 거쳐 뛰어난 학자들만 보임될 수 있는 양관(兩館ㆍ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했지만 정조가 독살설 끝에 사망(1800)하고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자 신지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참형 당하고 말았다. 윤행임은 하멜이 처음 표착했을 때 “코가 높고 눈이 깊으며 언어와 문자가 통하지 못했고, 혹은 서양인 혹은 남만인(南蠻人)이라고 하자 조정에서는 박연에게 가서 보게 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박연, 즉 벨테브레가 가서 만나보니 눈물을 뚝뚝 흘려서 옷깃이 다 젖었다고 한다. 북벌군주 효종은 역법(曆法)에 능통하고 조총과 대포(大?)도 주조할 줄 알던 하멜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켰다. 그런데 박연은 끝내 조선땅에 뼈를 묻은 반면 하멜은 현종 7년(1666) 나가사키로 탈출해 네덜란드로 돌아가 하멜표류기를 썼다.
요즘 각종 방송에 한국어에 능통한 외국인들이 자주 출연하고 있다. 조선어에 능통했던 박연은 하멜 일행에게 3년 동안 조선의 언어와 풍속을 가르쳤다. 박연은 큰 키에 노란 머리, 푸른 눈을 지녔으며 겨울에 솜옷을 입지 않을 정도로 건장했다고 전하는데, 자신의 견문록과 선악(善惡)과 화복(禍福)의 이치에 대해서 자주 말해 도사(道士)와 같은 면모를 지녔다고 한다. 아마도 개신교의 교리를 설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울에서 조선 여자와 혼인해 1남 1녀를 두었다고 전하는, 박연이야말로 조선어에 능통했던 1세대 서양인이 아닌가 싶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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