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생애와 사상, 업적 정리…인간적인 면모도
다산 정약용의 현손 정규영(1762~1863)이 1921년에 편찬한 다산의 일대기 ‘사암선생연보’가 ‘다산의 한평생: 사암선생연보’(창비)라는 제하에 최초로 완역됐다. ‘사암선생연보’는 다산이 직접 쓴 ‘자찬묘지명’과 함께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가장 잘 정리한 기록물로 꼽힌다. 다만 ‘자찬묘지명’은 다산이 환갑 때 작성한 것이라 75세의 나이로 별세하기까지 15년의 시간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다산이 별세하고 85년 후 쓰인 ‘사암선생연보’에는 유년 시절부터 서거할 때까지 다산의 행적이 연대순으로 자세히 기록돼 있고 대표 저술의 서문이 거의 수록돼 있어 이 연보만으로도 다산의 일생과 학문의 개요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완역되지 못하고 ‘국역 목민심서’(민족문화추진회)와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다산시 연구’의 부록으로 실려 전해져 왔다. 이번 책의 역주를 맡은 송 교수는 ‘국역 목민심서’에 수록된 것이 “초역에다가 주석이 소략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며 “이번에 별책으로 출간하면서 몇 군데 손질을 하고 역주를 보강했다”고 역자 서문에 밝혔다.
정규영이 편찬한 연보는 다산의 가계 및 행적과 더불어 저술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공께서 돌아가신 지 85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연보가 편성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며 “저술이 풍부하기로는 신라ㆍ고려 이전이나 이후에 없었던 바(…) 그 편질이 방대하여 흩어지고 없어진다면 후손 중에서 누가 기억할 수 있을지 두렵다”고 편찬 경위를 밝혔다. “육경사서의 학에 있어서, ‘주역’은 다섯 번 원고를 바꾸었고 그 나머지 구경도 두세번씩 원고를 바꾸었다”는 대목에서는 학자로서 철저하고 치밀했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타인의 허물을 덮고 덕은 오래 간직하는 다산의 인간적 면모도 드러난다. 정규영은 “이기경ㆍ홍희운ㆍ윤극배의 일을 간략하게 기록하여 분노를 드러내지 않은 것은, ‘두고 보자’는 식이 아닌 공의 뜻을 받든 것”이라며 “윤남고?이장령?윤소고의 묘지명을 뽑아 실은 것은 은혜를 아는 공의 지극한 뜻을 받”든 것이라고 편찬자 후기에 기록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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