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차가워질 때 뜨끈한 아랫목이 생각나면 한옥 떠 올린다. 찾아 들어 하룻밤 묵으면 바쁜 일상에 지친 몸이 생기를 띄고 퍽퍽했던 마음도 개운해진다. 집에 깃든 이야기는 겨울밤 야참 같은, 기분 좋은 덤이다. 마침, 한국관광공사가 한옥 5곳을 12월에 가볼 만한 곳으로 추천했다.
●충남 서산 계암고택과 유기방가옥
충남 서산시 한다리마을은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 안주목사를 지낸 김연이 서흥부사로 재직할 때 임꺽정을 토벌하고 얻은 사패지를 근거로 약 500년 전 들어와 집성촌을 이뤘다. 김씨 가문은 많은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다. 김연의 7대손 김한구의 딸이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되었고, 추사 김정희도 이 가문의 후손이다. 한다리마을은 조선 시대 전형적인 부촌으로 기와집이 모여 있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계암고택과 정순왕후 생가만 남았다. 두 집은 담장을 이웃하며 오랜 세월 함께했다.
계암고택 행랑채와 사랑채 앞마당은 넓지 않아도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놀이터로 손색이 없다. 행랑채에는 집을 수리할 때 나온 기와로 꾸민 고려와당박물관도 있다. 사랑채는 차양을 둔 것이 돋보인다. 사랑채 한 칸 앞에 팔모기둥을 세우고,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 맞배지붕을 얹었다. 안채는 사랑채 끝 중문을 통해 연결된다. ‘ㅁ’자형 구조로 마당에는 오래된 우물이 자리한다. 안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공간은 부엌이다. 여느 한옥의 부엌에 비해 넓은 것도 그렇지만, 한옥 체험을 위해 본래의 구조를 그대로 둔 채 흙바닥에 황토석을 깔고 고풍스런 식탁을 둬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방에는 TV 같은 편의 시설이 없어 여행 온 동반자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도 좋다.
하룻밤 머무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한옥을 즐기고 싶다면 고택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해본다. 율병 만들기 같은 전통 음식 체험을 비롯해 와당 만들기, 시조창 부르기 등 다양하다.
여미리마을의 서산유기방가옥도 서산에서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1900년대 초에 세워진 한옥이다. 사랑채에서 한옥 체험이 가능하다. 지난해 방영한 드라마 ‘직장의 신’에도 등장한 곳이다. 여미리마을에는 볼거리와 체험거리도 많다. 정종의 4남인 선성군 사당, 수백 년 수령을 자랑하는 느티나무와 비자나무, 여미리 미륵불 등 역사와 문화적 자산들이 많다. 여기에 마을 정미소를 리모델링 해 꾸민 여미갤러리도 있다. 갤러리에는 연중 유명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카페에는 디자인 관련 서적이 벽면 가득해 전통적인 시골 마을에 새로운 복합 문화 공간의 역할을 한다. 생활문화센터에서는 질그릇, 도자기 같은 공예와 디자인을 배우고 체험하는 문화 공간이다. 계암고택 (041)688-1182, 유기방가옥(041)663-4326
● 전남 구례 쌍산재
전남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상사마을 들머리에 쌍산재가 있다. 해주 오씨인 주인장의 6대조 할아버지가 처음 터를 잡은 뒤, 고조부가 집 안에 서당인 쌍산재를 지어 오늘에 이르는 한옥이다. 여러 차례 보수와 증축을 거친 탓에 고택의 자취는 미미하지만 약 1만6,500㎡가 넘는 집터에 살림채 여러 동, 별채와 서당채 등 부속 건물, 대숲, 잔디밭까지 있다. 모든 건물이 숙소로 꾸며져 있어 호젓하고 편안한 한옥 체험이 가능하다.
쌍산재로 들어서기 전에 눈길을 끄는 것은 당몰샘이다.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인 샘으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그 맛이 달기로 유명하다. 전국 1위 장수 마을인 원인이 이 물에 있다 하여 지금도 인근에서 수시로 물을 길러 온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영험한 샘 덕분에 쌍산재의 대문은 왼편 모퉁이로 물러나 있다.
당몰샘 물맛을 보고 쌍산재의 아담한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가 마주 보고, 오른쪽에 무심한 듯 비켜 앉은 건너채가 있다. 갓 쓴 선비 대신 푸성귀 다듬는 할머니가 앉아있을 듯한 정겨운 구조다. 목에 힘이 들어간 양반 가옥이 아니라 소박한 여염집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이유가 특별하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책을 가까이하며 검소하게 살고자 한 선대의 가풍 때문이라는 주인의 설명이다.
대문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것은 울창한 대숲 사이로 난 돌길이다. 한 발 한 발 돌을 디디며 처마가 멋들어진 별채와 아담한 정자인 호서정을 차례로 만난다. 대숲이 끝나는 곳에 하늘과 잔디밭, 동백나무에 둘러싸인 서당채가 있다. 집안의 자제들이 모여 글을 배우던 곳으로, 이 집의 주인도 서당채에서 천자문을 떼고 학교에 들어갔다고 한다. 쌍산재 쪽문을 열어젖히면 쌍산재와 나란히 자리한 저수지가 보인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겨울 아침에 조용히 쪽문을 열고 나가 저수지를 산책하는 것은 쌍산재에 머물며 만나는 즐거움 중 하나다.
집안 아녀자들이 푸성귀를 심어 가꾸던 텃밭은 잔디밭으로 바뀌어 부모 따라 여행 온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고, 돗자리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는 공간이 되었다.
겨울 한옥 체험의 즐거움 중 하나는 따끈한 아랫목을 즐기는 것이다. 쌍산재의 모든 숙소는 아궁이에 불을 지필 수 있다. 보통은 보일러를 가동하지만, 손님들이 원할 경우 직접 아궁이에 불을 땔 수 있도록 준비해준다. 나뭇가지로 불을 피우고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특별한 추억을 남기 수 있다.
쌍산재에 머물며 지리산둘레길과 이어진 상사마을을 산책하는 시간도 특별하다. 구불구불한 마을 길을 걷고, 주민들이 함께 운영하는 카페 ‘단새미’에서 차 한잔과 빵으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다. 마을 앞으로 펼쳐진 들녘을 바라보며 걷는 산책길은 지리산과 섬진강의 맑은 기운이 전해진다. 쌍산재 (061)782-5179
● 경북 청송한옥민예촌
청송에는 고택이 많다. 주왕산 입구에 청송한옥민예촌이 있다. 대감댁, 영감댁, 훈장댁, 정승댁, 참봉댁, 교수댁, 생원댁, 주막 등 총 8동의 건물에 모두 28개의 방이 있다. 대부분 청송의 고택을 모델로 지은 건물이다. 이 때문에 이곳에선 청송의 전형적인 가옥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대감댁은 송소고택이 있는 파천면 덕천마을 가옥 중 초전댁을 재현한 것으로, 상류층 양반집 형태를 감상할 수 있다. 솟을대문을 지나 들어가면 마당이 나오고, 사랑채 문을 통과하면 ‘ㅁ’자형 안마당에 이른다. 안채와 사랑채, 대문채까지 방이 여러 개 있다. 부엌에는 부뚜막과 가마솥, 맷돌, 소반, 찬장 등을 옛 모습 그대로 전시해 뒀다. 영감댁에는 디딜방아가 있다. 정승댁은 덕천마을 송소고택의 안채를 재현한 건물이다. 이밖에 ‘ㄷ’자형 건물에 누마루가 인상적인 훈장댁, 농민이나 서민의 가옥 구조를 보여주는 참봉댁과 생원댁, 외양간이 있는 교수댁, 마당에 넓은 평상을 펼쳐놓은 주막 등 집집마다 생김이 다르고 개성이 있어 한 집 한 집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돌을 섞어 쌓은 토담이 보기 좋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토담을 따라 걷는 골목길이 운치 있다. 민예촌 뒤로 산책로가 있고, 고개를 들면 청송의 명산 주왕산이 멀리 보인다.
민예촌 인근 도예촌에는 심수관도예전시관, 청송백자전시관, 전통 가마, 도예 공방이 한데 모여 있다. 청송한옥민예촌 (054)874-9098
● 강원도 영월 조견당과 우구정가옥
주천면의 주천고택 조견당은 옛것과 새것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한옥이다. 느티나무 고목 아래 안채는 1827년에 상량했으니 그 세월이 200년 가까이 된다. 안채 대청마루의 천장을 떠받친 웅장한 대들보만 봐도 당시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대들보 목재의 수령만 800년쯤 된다고 하니 가옥에 1000년 세월의 깊이가 담긴 셈이다.
조견당은 한때 99칸이 넘는 규모로 중부 지방 양반집을 대표하는 전통 가옥이었다.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나머지 가옥은 대부분 손실되고, 현재는 안채만 남아 있다. 조견당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71호에 등재되었으며, 김종길가옥으로도 불린다.
기품이 묻어나는 안채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가 쏟아진다. 안채의 동, 서, 남쪽 지붕 아래에는 해, 달, 별이 조형되었다. 동쪽 벽은 흑, 백, 황, 적, 청 다섯 가지 색 돌로 꾸며졌는데, 이는 조견당에 우주의 원리와 음양오행의 정신이 담겨 있음을 뜻한다. 안채 옆의 커다란 너럭바위는 하인들의 규율을 잡는 터로 쓰였다고 한다.
조견당의 장점은 한옥에서 하룻밤 묵는 데 그치지 않고 종부가 들려주는 고택의 사연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채 외벽에 새겨진 문양과 집의 역사에 관한 얘기를 듣다 보면 고택에서 머무는 하룻밤이 더욱 잔잔하게 새겨진다. 이외에도 종부와 함께하는 다도 체험 같은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주인장이 아홉 번 덖어 달인 맨드라미차를 꼭 맛본다.
조견당 안채가 옛 모습을 간직했다면, 사랑채는 새롭게 단장해 깔끔하다. 나무의 특성을 살린 내부 장식 또한 정갈하다. 사랑채는 안사랑과 바깥사랑으로 나뉜다. 안사랑은 통유리 너머로 안채와 마당이 보여 풍취가 뛰어나며, 바깥사랑은 차 한잔 마시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실내 공간과 연결된다.
투숙할 수 있는 방은 모두 아홉 채로, 안채에서 묵으면 장작불을 이용한 구들 체험이 가능하다. 조견당 밖으로 나서면 주천 읍내와 주천강이 걸어서 닿는 거리다.
남면의 우구정한옥은 전통 시골집의 정서가 남아 있는 한옥이다. 100년이 넘은 한옥은 큰 자리바꿈 없이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장작을 때는 아궁이며, 그 위에 가마솥까지 어릴 적 시골 할머니 댁에 놀러 온 듯 푸근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집 밖으로 배추밭이 펼쳐지고, 모퉁이에는 수백 년 세월을 지켜온 느티나무가 서 있고, 밭 너머로는 평창강이 흐르는 고요한 시골 마을이다.
우구정가옥은 안채, 사랑채, 헛간채로 구성된 ‘ㅁ’자 형 기와집이다. 자연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안채 뒤로 돌담을 두른 중부 영서 지방의 전통 가옥 형태를 띤다. 방은 안채, 건넌방, 사랑방 등 단출하게 세 개다. 이 방은 모두 장작으로 구들에 불을 땐다. 방 옆에는 대청마루와 툇마루가 붙어 있고, 창호 문만 열면 소소한 시골 정경이 펼쳐진다. 우구정가옥은 남부 지방 고택처럼 번듯하고 웅장한 느낌은 아니지만, 툇마루에 내려앉는 아침 햇살과 인심으로 건네주는 고구마 몇 개가 훈훈하게 다가서는 집이다. 조견당 (033)372-7229, 우구정가옥 (033)372-5704
● 경기도 연천 조선왕가
연천읍 현문로 조선왕가가 있다. 원래 조선왕가의 염근당은 원래 서울 명륜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성균관대학교 옆에 있던 이 집은 대학 기숙사에 터를 내주고 사라질 운명이었다. 위기에 처한 염근당을 연천군으로 옮겨 지은 사람은 조선왕가의 주인 남권희, 김미향 씨 부부다.
건물 해체 도중 집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줄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상량문에는 이 집을 지은 사람이 고종 황제의 손자 ‘이근’이며, 건물의 이름이 ‘미나리처럼 혼탁한 물속에서도 추운 겨울을 이기고 자라는 기상을 생각하는 집’이라는 뜻이 있는 ‘염근당’이라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황손의 집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는 귀중한 한옥이었던 것. 두 사람은 염근당을 연천으로 옮겨 짓는 동안 커다란 기둥 하나, 장대석 하나 다치지 않고 조선 시대 건축양식에 맞게 복원되도록 꼼꼼히 살폈다. 여러 전문가의 도움이 있었다고 해도 99칸 한옥을 옮기는 일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한겨울 추위에 황토 작업을 할 수 없어 인부들을 돌려보낸 일도 그중 하나. 그 겨울 왜 이리 힘든 일을 자처했는지 슬며시 고민이 머리를 들었다. 하지만 소나무 위에 작은 둥지를 틀기 위해 수많은 나뭇가지를 떨어뜨리며 수고하는 까치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덕분에 객실 내부에 현대식 화장실을 갖추고 125칸으로 규모를 키운 조선왕가가 탄생했다.
조선왕가의 한옥은 본채인 염근당과 행랑채인 사반정, 별채인 자은정으로 구성된다. 염근당은 황손의 집답게 장대석을 높이 쌓은 기단 위에 우뚝 자리한다.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로 뻗은 건물은 ‘ㄷ’자 모양이다. 주련으로 장식된 기둥과 대들보는 일반 민가에서 보기 드문 곧게 뻗은 나무를 사용했다. 어디 하나 금 가고 터지지 않은 나무를 보면 오래전 지은 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모두 궁궐을 지을 때 쓰이는 잘 말린 금강송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염근당을 내려서면 대문채인 사반정이 있다. ‘一’자 건물인 사반정에는 연천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누마루가 있다.
염근당 뒤편에 자리한 자은정은 이 집의 별채다. 연천으로 온 주인 부부가 처음 기거하던 곳인데, 지금은 여러 가족이 함께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준비되었다. 명륜동 시절엔 고 박정희 대통령도 자주 들른 집이다.
조선왕가에서는 숙박 외에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약재를 넣어 끓인 물로 온몸의 독소를 빼내는 왕가비 훈욕 테라피, 황토편백찜질방에서 찜질하기, 약재 가루를 넣어 비누 만들기 등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글램핑장도 운영된다. 이곳에서 직접 발효한 여러 가지 효소차와 약선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카페테리아도 운영된다. 조선왕가 (031)834-8383
김성환기자 spam001@hksp.krㆍ자료제공=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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