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까지 함경도 동북단 경흥군 신안면의 한적한 어촌이었던 나진(羅津).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본격적인 대륙진출을 꾀하던 일본은 이곳의 천혜의 조건에 주목했다. 수심이 깊으면서도 파도가 잔잔해 군사ㆍ물류 거점으로 최적의 조건이었다. 1934년 읍으로, 2년 뒤에는 부로 승격되면서 나진은 일제의 대륙 침략과 수탈을 위한 핵심 거점으로 개발ㆍ이용되었다. 해방 후 1970년대 중반까지는 소련이 극동해군의 부동항 기지로 빌려 쓰기도 했다. 천혜의 지리적 조건이 오히려 굴곡의 역사를 불렀던 셈이다.
▦ 나진은 1993년 옛 웅기면이었던 선봉군과 통합돼 나선 경제특구가 되었고, 특히 유엔개발계획(UNDP)의 두만강개발계획 중심지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북한 체제의 경직성과 미비한 기반시설 등에 발목을 잡히면서 개발계획은 시들해지고 세인의 관심에서 점점 잊혀져 갔다. 그 사이 경제특구가 평범한 시로 격하돼 함경북도에 편입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나진항이 다시 국제적 물류 거점으로서 가치가 재평가되면서 특급시, 직할시를 거쳐 지금은 특별시로 대접 받고 있다.
▦ 동해 출구를 찾는 중국과 극동지역 개발의 발판을 만들고자 하는 러시아 간 나진항 활용 경쟁이 뜨겁다. 최근 북중 간 서먹한 관계로 중국 중앙정부 차원의 관심은 덜한 듯 하나 지린성 등 동북 지방정부의 노력은 여전하다. 러시아는 2008년 나진항 3호 부두 50년 사용권을 확보한 데 이어 극동지역 하산과 나진항을 잇는 54㎞ 구간 철도 개ㆍ보수를 마치면서 나진항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러시아는 특히 나진항을 매개로 한 남북러 경협에 열심이다.
▦ 24일은 남북러 경협 추진에 각별한 날이다. 하산-나진항 철도를 통해 운반된 시베리아산 유연탄 4만5,000톤이 이날 나진항 3호 부두에서 중국선적 화물선에 실리기 시작했다. 이 배는 28일 나진항을 떠나 29일 밤 포항항에 도착한다. 남북러 협력사업인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시범 운송이다. 실어온 유연탄은 포스코 쇳물 생산에 사용된다. 포스코 현대상선 코레일 3사 콘소시엄의 간접투자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사업은 5ㆍ24조치의 예외다. 바야흐로 한반도 100년 먹거리의 물류거점이라는 나진항 시대의 막이 오르는 것일까.
이계성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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