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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지기(知己)를 보내며

입력
2014.11.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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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공동체를 꾸리며 많이 아플 때가 있다. 함께 길 걷던 이들이 공동체를 떠날 때다. 비제도권 인문학 공동체라는 곳이 학원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어서 만남과 헤어짐이 잦은 편이다. 특정 강좌나 세미나가 끝나면 함께 공부하던 이들도 흩어진다. 이 강의, 저 세미나에 참여하며 제법 오래 공부하던 청년들도 유학이나 취업을 하면 떠나고, 직장인들은 일이 바빠지면 공동체와 멀어진다. 그러나 뒤에 남아 함께 하던 이들을 떠나보내는 아픔은 좀처럼 면역이 생기지 않는다. 공동체 여기저기에 흔적만 남겨진, 떠난 이들의 빈자리를 보는 느낌은 늘 쓸쓸하다. 내가 어느 날 공동체를 떠난다면 이런 쓸쓸함을 못 견뎌서가 아닐까.

벌써 송년 시즌이다. 송년회를 알리는 메일이나 메시지가 부쩍 늘었다. 문화 예술 이벤트도 있지만, 대부분 먹고 마시는 흥청망청 모임이다. 이들 모임을 외면한 채 연말에 시작할 또 다른 강좌와 세미나를 기획한다. 들뜬 분위기에 저항이라도 하듯 묵직한 장기 강좌와 세미나가 대부분이다. 곧 시작하는 주역 원전 강독부터가 2년이나 걸리는 공부 장정이다. 얼마 전에 시작한 마르크스 자본론 강독도 1년 이상 걸린다. 현재 기획하고 있는 프랑스 구조주의 중심의 현대 철학입문 강좌도 1년은 진행될 강좌이고, 곧 시작하는 정신분석 세미나도 끝날 날이 예정돼 있지 않다. 인문학은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 긴 호흡으로 평생 공부를 이어가야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공동체에 장기 강좌나 세미나를 많이 개설한 것은 인문학 공부의 이런 속성보다 잦은 헤어짐이 싫어서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장기 강의와 세미나가 요즘 들어 처음 생긴 건 아니다. 주역강독에 앞서 논어집주와 맹자집주, 도덕경, 장자 강독에도 2년 이상이 걸렸다. 플라톤의 대화편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그리스 철학 읽기 모임은 3년 이상 계속돼 왔다. 스피노자의 에티카 강독도 3년 가까이 걸리는 대장정이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도 1, 2년의 기간이 소요된다. 들뢰즈, 푸코, 화이트헤드, 하이데거, 아도르노, 벤야민, 데리다를 전공한 학자들은 자신의 연구 계획에 따라 강의와 세미나를 진행한다. 각각의 강의는 단발성일 수 있어도 전체적으로는 5년 정도의 단위로 계획된 장기 강좌다.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아랍어, 히브리어 등의 고대어로, 경전이나 고전을 소리 내어 읽는 모임도 5~10년이 소요되는 초장기 기획이다. 인문학에 필요한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라틴어, 희랍어 역시 몇 달 만에 익힐 수 있는 외국어가 아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로서는 중요한, 또 다른 장기 기획이 있다. 대안 철학 대학원 과정이다. 철학의 체계적인 이해 못지않게 사유의 방법, 사유의 훈련 등을 깃발로 내세운 과정의 수학 기간은 3년. 철학이론뿐 아니라 문학과 영화 텍스트 등을 오가며 인문학을 자신의 구체적인 삶이나 일과 연결시키려면 이 정도 공부는 필요하다. 철학 대학원인 만큼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짚고 넘어가야 할 개념들과 철학하는 방법에서 시작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기본을 반복하며, 이를 글쓰기로 드러내는 연습도 필요하다. 이런 공부로 생각이 바뀌면 삶이 바뀌고 세상이 변화한다. 인문학 공부가 실용과 거리가 멀면서도 가장 실천성이 강한 공부이자 일종의 수행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강의와 세미나로 사람을 잡고자 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떠난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중도 탈락하는 이도 있고, 표시도 안 나는 긴 공부에 지친 이도 있다. 공부가 직업이 아닌 이들이 대다수인 공동체에서, 공부가 생산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생활 따로, 공부 따로를 지속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공부와 생산이 동시에 가능한 직장 공동체를 꿈꾸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엊그제 또 한 사람, 아름다운 도반이 공동체를 떠났다. 많은 꿈 함께 하던 소중한 지기(知己)여서, 상실의 아픔은 크다. 아무쪼록 앞길에 행운이 늘 함께 하기를….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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