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책 중 반복해서 즐겨 읽는 작품은 ‘1973년 핀볼머신’이다. 하루키는 창작태도뿐 아니라 산실에 있어서도 꽤 성실하고 꾸준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내가 하루키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세상과 상관없는 짓을 벌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주인공들은 딴짓을 하다가 이야기 속 ‘사건’에 빠져버린 경우가 많다. 나는 그 점이 무척 마음에 든다. 의미심장하다가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픽션보다 하릴없이 빈둥대고 허튼 짓을 하다가 자신의 인생에서 독특한 사건을 마주하는 픽션이 내 기호로선 적당하다. 그런 점에서 ‘1973년 핀볼머신’은 모든 점을 만족시킬 만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보다 ‘1973년 핀볼머신’에 더 강한 애착을 갖는 듯하다. 그는 서문에서 ‘부엌 테이블에서 이 책을 홀린 듯이 써 내려갔다’고 했다. 또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들을 한 대상에 집중시킬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환상의 핀볼머신!’ 이라고 표현했다.
핀볼머신은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오락기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1970년대 일본이나 미국의 오락실에 가면 쉽게 볼 수 있었다. 과거 우리나라 오락실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웨스턴 바 같은 곳에 전시용으로 구석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핀볼머신은 ‘명랑한 우울’을 가지고 있는 기계다.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레버를 전후좌우로 당기면서 세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짓을 벌이곤 했던 경험말이다. 우리는 모두 인생에서 그런 경험을 한 두번 정도는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세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짓에 달려있다.
핀볼연구서 ‘보너스 라이트’의 서문에 의하면 당신이 핀볼머신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수치로 환산된 프라이드뿐이다. 그러나 잃는 것은 실로 많다. 당신이 핀볼머신 앞에서 고독한 소모를 계속하는 사이 어떤 자는 토익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떤 자는 드라이브 인 시어터에서 여자친구와 헤비 페팅에 몰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핀볼머신은 당신을 어떤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는다.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만 반복할 뿐이다.
리플레이라는 말에는 묘한 여운이 있다. 지독한 회의를 반복하면서도 일그러진 열정으로 빠져드는 청춘에 대한 묘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쥐는 말한다. ‘어디로 갈 거지?’‘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대화는 기계의 회전처럼 빠르게 돌고 돌아온다. 핀볼에 빠져있는 동안 한 반년 정도 어두운 구멍 안에서 지낸 것 같다며 어느날 밤 쥐는 간밤에 마신 지근한 맥주를 다 토한 후 변기에 앉아 중얼거린다. 소설 ‘1973년 핀볼머신’은 기행문처럼 보인다. 바꾸어 말하면 이 소설은 핀볼머신이라는 기계를 찾아 떠나는 한 남자의 여행기다.
낯선 고장 이야기를 좋아하는 주인공 쥐는 젊은 날 사랑을 잃고 상실의 아픔 속에서 핀볼게임에 빠져든다. 동전을 투입하면 플레이어의 조작에 따라 독립된 공간 안에서 볼들이 깜박인다. 드롭 타깃. 퀵 아웃, 홀롯 타킷, 마지막으로 보너스 아웃레인을 돌고 나면 게임은 끝난다.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보다 빠르게 소모된다. 쥐는 다시 리플레이 램프가 들어올 때 까지 어두운 눈꺼풀을 끔벅이며 기다린다. 핀볼은 게임 속에서 이별과 상실을 반복해서 재생한다. 사실 대부분 오락실에서 무언가를 얻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동네에 작은 오락실이 생기면 소년이건 성인이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특별한 목적 없이 몰래 여행을 다녀오곤 하지 않는가.
오락실을 다녀왔다고 너스레를 떨거나 모험담을 늘어놓는 자는 드물다. 아무에게도 잃은 것을 설명하려 하지 말라. 그것이 핀볼머신 게임의 지혜다. 핀볼게임을 하면서 우리는 어쩌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동행을 이루는 경우는 드물다. 핀볼머신을 하면서는 서로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다. 그저 무수한 반복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쥐는 진지하게 말한다.
‘정작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다들 누군가에게 혹은 세계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전하고 싶어 했다’고.
김경주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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