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산기 교체문제를 둘러싸고 지주사 회장과 은행장이 충돌하는 볼썽 사나운 모습을 연출하는데도 사외이사들은 손 놓고 있었다. 은행장에 이어 회장이 물러나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이가 없고, 한 일이라곤 새 회장 겸 행장을 뽑은 게 전부다. 그런데도 어제 열린 KB금융지주 주주총회에서 한 사외이사가 “외부에 비쳐지는 것처럼 사외이사들이 이익만 챙기고 책임을 지지 않을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강변했다고 한다. 금융위원회가 20일 금융사 사외이사 자격요건 등을 담은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을 마련해 입법 예고한 건 만시지탄이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이번 모범규준의 골자는 사외이사 구성의 다양성과 전문성 강화에 있다. 이사회에 여러 직군ㆍ직종 전문가들이 균형 있게 포진할 수 있도록 금융 회계 경영 분야의 경험과 지식을 사외이사의 자격요건으로 명시했다. 교수나 관료 출신이 4대 금융지주 사외이사의 62%를 독식하면서 끼리끼리 권력화하는 폐단을 차단하겠다는 취지다. 기관투자자, 주주도 사외이사를 추천할 수 있도록 한 대목도 같은 맥락이다. 사외이사에 대해 매년 금융사 자체평가와 2년마다 외부기관의 평가를 받도록 권고한 점도 제대로 시행되어야 한다.
사외이사제는 외부 전문가를 이사회에 참여시켜 대주주의 전횡을 막고 경영진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하자는 취지에서 외환위기 직후 도입됐다. 하지만 현실은 딴판이었다. 주인이 있는 기업의 경우 오너와의 개인적 인연을 통해, 금융기관은 최고경영자(CEO)나 정치권의 낙하산을 통해 선임되는 경우가 잦다 보니 쓴 소리를 내기 보다는 거수기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금융권 사외이사의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책임은 다하지 않은 채 경영진 선임과정에서 막대한 권한을 휘두르면서 때론 최고경영자와 유착하거나, 사외이사끼리 서로 자리를 대물림 해 많은 비난을 받았다.
모범규준이 이런 문제점을 뜯어고치는 전기가 돼야 함은 물론이다. 당국은 입법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부족한 부분을 더 보완해야 한다. 무엇보다 사외이사와 경영진의 유착을 막기 위해 신임 경영진을 선출한 사외이사는 물러나도록 하고, 권고사항으로 돼 있는 모범규준을 위반할 경우 직접 제재를 가하는 쪽으로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또 이사회가 매년 최고경영자 후보군의 관리와 승계계획의 적정성을 점검하도록 했는데, 구두선에 그쳐서는 안 된다. 주요 금융그룹이 회장이나 행장의 승계 때마다 정치권의 낙하산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만큼 이를 막을 방안을 보다 구체화해야 한다. KB금융지주 같은 사태가 더 이상 반복되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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