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성군 정조는 비변사를 통해 위로는 정승판서로부터 아래로는 대궐을 지키는 군졸까지 포함하여 국사를 맡은 모든 신하가 제각기 품고 있는 생각을 진언(進言)하라는 교시를 내렸다. 한마디로 생각한 바를 가감 없이, 거리낌 없이 다 쏟아내라는 명이다. 이에 실학자로 유명한 박제가가 올린 상소문이 걸작이다. 성상(聖上)께서 나라를 다스리시는 동안 많은 제도가 정비됐으며, 논쟁거리가 될만한 일은 성상께서 반드시 먼저 실행에 옮겼으므로 드려야 할 말씀이 실제로는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서두를 꺼낸다.
미치광이 장님처럼 당돌한 짓도 피하지 않고 한 두 마디 올린다면서 정책 제언을 하나 골자는 그간에 행했던 정조의 정책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가의 가장 큰 폐단은 가난이며, 놀고먹는 나라의 큰 좀벌레, 사대부들은 날로 번성하고 있다는 등 각종 악폐(惡弊)를 진단하면서 대책을 담았다. ‘북학의ㆍ돌베개’에 나오는 이야기다. 때는 1786년. 즉위 후 매진했던 지난 10년간의 개혁은 미봉이며, 근본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박제가의 상소문을 읽고 정조의 심기가 크게 불편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20일 여당 지도부와의 청와대 회동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참 편했을 성 싶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공무원연금 개혁과 FTA 비준동의안, 민생법안, 내년 예산을 거론하면서 경제의 재도약을 위해 적기에 처리됐으면 한다고 했다. 이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당에서 제대로 뒷받침을 못 해 송구한 마음”이라며 한껏 자세를 낮췄다. 개헌과 공무원연금 개혁에서 청와대와 각을 세우던 얼마 전과 비춰보면 확 순치된 모습이다.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이 주요법안 처리 현황자료를 들고 간 걸 보면 당ㆍ청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박 대통령은 여ㆍ야ㆍ청 회동을 거절한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의 부재에 대해 “부탁을 좀 드리려고 했는데 안타깝다”고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묘사된 이날 회동에 참석하지 않은 문희상 새정치연합 비대위원장은 “지금은 여야가 청와대로부터 교시를 받을 때가 아니다”고 했다. 말실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대통령과의 대화를 교시로 여긴 야당 대표가 있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이를 교시로 착각할 국민도 없다. 문득 1년여 전의 일이 오버랩 된다. 박 대통령과의 회동 자리에서 국정원 대선개입 문제로 설전을 벌였던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많은 얘기가 오갔지만 (대통령의 말에)정답은 없었다”고 대놓고 비판했다.
대통령과 만나 면전에서 쓴 소리를 하고, 얼굴을 붉힐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이는 대한민국에 야당 대표밖에 없다. 경제정책에서부터 인사실책, 이른바 사자방(4대강, 자원외교, 방위산업) 비리 등 야당이 심각하게 보는 나랏일이 어디 한 두 가지인가. 덮어놓고 싸울 일은 아니지만 대통령이 직접 듣지 못하는 얘기, 다른 생각을 생생하게 전할 기회를 차버린 것은 아닌가. 박 대통령은 이날 여당 지도부에게 ‘적기’라는 말로 다시 한번 연내 처리라는 ‘데드라인’을 제시했다. 400만 이해관계자가 있는 공무원연금 개혁이 연내 가능한 일인지 의문을 표시하고, 절차나 시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야당 지도부가 그 자리에서 했어야 할 일 아닌가. 대통령 앞에서 정국 현안에 대한 야당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면 향후 여야 협상에서도 유리했으면 했지, 불리할 일은 없다.
스스로 불통을 하고서야 조자룡 헌 칼 쓰듯 하던 대통령의 불통정치 비판을 앞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대통령은 부탁하려고 만나자 했지만, 야당이 생각하는 현안도 진지하게 들어보겠다는 취지가 깔려 있는 게 아니었던가. 문 위원장은 의제 조율이 안된 상황에서 “대통령 체면을 고려해 누가 되지 않게 회동을 미뤄둔 것”이라는 말도 했다. 야당 대표가 대통령 앞에서 못 할 이야기가 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혹시라도 지난달 말 여ㆍ야ㆍ청 회동 후 당내의 ‘호인 정치’ 비판에 움츠러든 것은 아닌가. 문 위원장의 실책은 딴 곳에 있지 않다. 대통령을 불편하게 만드는 책무를 포기한 것이다. 그건 야당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이다.
정진황 논설위원 jhchu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