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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하방 떠난 어린 홍위병, 민주투사가 되어 돌아오다

입력
2014.11.2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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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 후 민주화 투신… 중졸 후 6년간 내몽고서 비참한 농촌현실 경험

시위 주도로 투옥 반복… 톈안먼 사태 땐 시위대 지원 배후로 지목돼 13년 최고형

조국 끝까지 지킨 애국자… 당국 탄압에도 망명 안 택해 "파국없는 민주화 꿈꾼 지도자"

[1952.1.8~2014.10.21] 천쯔밍이 텐안먼 시위의 전면에 나선 적은 없다. 하지만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자신이 섰던 광장의 자리에서 단 한 걸음도 퇴각하지 않았다. 그는 실천적으로 온건했으나 사상적으로 완강했고, 중국 재판부의 낙인처럼 실천적 배후 조종자는 아니었지만, 중국 민주화 운동의 사상적 배후였다. standoffattiananmen.com
[1952.1.8~2014.10.21] 천쯔밍이 텐안먼 시위의 전면에 나선 적은 없다. 하지만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자신이 섰던 광장의 자리에서 단 한 걸음도 퇴각하지 않았다. 그는 실천적으로 온건했으나 사상적으로 완강했고, 중국 재판부의 낙인처럼 실천적 배후 조종자는 아니었지만, 중국 민주화 운동의 사상적 배후였다. standoffattiananmen.com

1989년 중국 텐안먼(天安門)사태의 배후로 지목된 천쯔밍(陳子明)이 10월 21일 췌장암으로 숨졌다. 향년 62세. 그는 텐안먼의 투사도, 중국 공안당국의 발표처럼 ‘반혁명의 검은 손(지하 지도부)’도 아니었다. 하지만 텐안먼사태 관련자 가운데 최고 형인 13년 형을 선고 받았고, 숨질 때까지 투옥-가석방- 연금-재투옥- 연금 생활을 지속했다. 국제 사회에 잘 알려진 텐안먼의 투사들이 대부분 미국 영국 대만 등지로 망명ㆍ이민을 선택했지만 그는 중국을 떠나지 않았다. 안에서, 다시 말해 억압 속에서, 자신과 89년 역사의 정당성을 옹호했고 조국의 낙후한 정치와 인권 현실을 가명의 글로 공격했다. 그는 80년대 이후 중국 민주화 운동의 현장을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단 한 번도 돋보이는 자리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 그는 ‘든든한 배후’였다.

지난 달 25일, 공안요원 수백 명의 검문ㆍ통제 속에 베이징(北京)시 장핑구 자택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여성 경제인 왕잉 등 약 500여 명의 추모객이 참석했다. 저명 사회학자 젱예푸(전 베이징대 교수)는 추도사에서 고인의 겸손함을 이렇게 기렸다. “첸은 여러 면에서 정치를 해야 했을 사람이지만, 중국을 비롯한 여러 현대의 정치인들에 견줘 그에게는 단 하나의 커다란 결점이 있었다. 그는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대중을 선동할 줄도 큰소리를 칠 줄도 몰랐다. 그는 너무 큰 이성적 재능을 타고 났다.” 서양사학자 미첸펭(전 중국인민대 교수)은 “해외 망명자를 비롯한 중국 민주화 운동의 거물들이 서로를 헐뜯느라 바쁘지만, 천쯔밍을 험담하는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긴 옥고를 (훈장인 양) 뽐낸 적도 없었다. 고인을 만난 적은 없지만 울기 위해서, 존경의 마음을 바치기 위해서 여기 왔다”고 말했다.(월스트리트저널 중국판, China Real Time, 2014.10.27)

천쯔밍은 1952년 1월 8일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나 베이징에서 자랐다. 엔지니어와 정부영상제작소 매니저였던 그의 부모는 공산당 중간 간부였고, 상대적 특권층으로서 그는 어려서부터 중국 사회주의 주요 저작과 마르크스-레닌 사상서를 섭렵했다. 66~67년 마오쩌뚱(毛澤東)과 장칭(江靑) 등 4인방이 주도한 문화대혁명 초기, 중학생이던 그 역시 홍위병이었고, 69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농촌 하방(上村下鄕 ㆍ상촌하향)’대열에 합류했다. 6년간 내몽고 벽촌에서 그는 주민들에게 전염병 예방주사를 놓기도 하고, 상수도 공사 인부로도 일했다.(뉴욕타임스)

천쯔밍을 비롯한 상당수 청년들에게 하방 시기는 중국 사회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당 이데올로기와 정치를 회의하는 기회가 된다. 실제로 문혁의 홍위병 상당수는 70~80년대 중국 민주화 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한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대만 국립 칭화(靑華)대 교수가 된, 텐안먼의 주역 왕단(王丹)은 2012년 발간한 중국현대사에 이렇게 썼다. “낮은 계층의 현실과(…) 고된 생활은 그들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혁명에 대한 장밋빛 환상을 깬다. 한 세대 전체가 환멸의 토대 위에서 새롭게 생각하게 되자 중국 공산당의 독재에 대한 회의, 더 나아가 비판의 씨앗이 심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홍위병 세대가 농촌으로 간 것은 ‘문화대혁명’의 절정이 이미 지났고 특히 젊은 사람들의 격정이 마침내 냉각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낸다.”(책 243쪽)

천쯔밍은 74년 북경으로 돌아와 북경과학기술대학에 입학하지만, 4인방을 비판하는 내용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가 적발돼 반혁명분자라는 죄명으로 강제노역형을 산다. 2년 뒤인 76년 4월 그는 제1차 텐안먼 사태라고도 불리는 ‘4ㆍ5 운동’의 현장에 있었다. 병사(방광암)한 개혁파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애도하기 위해 광장에 모인 시민 학생들은 이날 4인방 정책을 공개적으로 성토했고, 공안당국의 각목 진압으로 388명이 연행된다. “나서기 싫어하는”천쯔밍이 그 군중 앞에서 우연찮게 성토문을 낭독하게 됐는데, 누군가가 ‘좀 크게 읽으라’고 고함을 쳤고 그 때 가뜩이나 위축된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격려하듯 두드렸다고 한다. 훗날 천쯔밍은 “내 어깨에 손길이 닿는 순간 내 뇌가 거대한 파도처럼 부풀어오르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고, 조지 블랙 등은 93년 저서 베이징의 검은 손들(Black Hands of Beijing에 기록했다.

중국 현대사에서 1976년은 특별한 해다. 1월에 저우언라이가 숨졌고, 4월에 1차 텐안먼사태가 터졌다. 7월에는 주더(朱德)가, 9월에는 마오쩌뚱이 사망했다. 그리고 10월 ‘4인방’이 숙청되고 화거펑 리센녠 예젠잉 등샤오핑 등이 권력 전면에 부상했다. 76년은 역사의 전환기였다. 천쯔밍도 얼결에 반혁명분자에서 용기 있는 투사로 부각되며 대학에 복귀한다. 그는 생화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북경 과기대 대학원 학생회 주석으로 활동했다. 그 즈음 그는 이미 대학가의 독보적 이론가이자 정세 분석 및 전략가로 꽤 알려진다.

78년 말, 이른바 ‘시단민주벽(西單民主牆)’ 운동이 시작된다. 베이징 시단 교차로 인근 버스 정류장 약 200m 폭 회색 담장에 청년 논객들의 정론(政論) 대자보들이 나붙기 시작한 것이다. 개혁과 민주주의, 마오의 공과 평가 등 다양한 주제의 글들이 논쟁을 불 붙였고, 수많은 민간 시사잡지들이 간행됐다. 80년대 중국민주화 운동의 서막이었다.

천쯔밍은 친구이자 동지인 왕쥔타오와 함께 당시 베이징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3대 간행물가운데 하나였던 베이징의 봄(北京之春)을 창간한다. 천쯔밍이 창간사에서 밝힌 바, 잡지가 겨냥한 것은 중국의 전제적 정치와 인민의 몽매주의였다. 다시 말해 학술적 사상해방과 민주화 운동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그들에게는 후야오방(胡耀邦)이라는 개혁ㆍ개방적 정치인이 있었다. 후야오방의 측근으로 훗날 당 비서국 중앙위원이 되는 바오퉁(鮑?) 등 정치인과 전문가그룹의 이론학습회의도 활발했는데, 청년들의 시각이나 논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강도 높은 비판과 개혁안들이 그 자리에서 활발히, 공개적으로 제기되던 때였다.

천쯔밍은 북경의봄 글에서 당시 개혁파의 주장을 두 부류 즉, 문혁의 오점을 극복하는 선에서 정치체제를 긍정하는 경제개혁파와 전면개혁파로 나누고, 전면개혁파를 경제개혁 선행론, 정치개혁 선행론, 경제 정치 병행론의 세 유형으로 분류했다. 천쯔밍은 병행론자였다. 그는 공산주의 중국 역사상 최초의 민간 싱크탱크인 ‘베이징 사회경제연구소’를 설립해 ‘주간 경제(Economic Weekly)’같은 소식지를 발간했고, 청년들을 대상으로 교육 활동을 벌였다. 중국 민간 연구기관으로선 최초로 정치현안 설문조사를 벌여 국민 72%가 중국의 정체로 민주주의를 희망한다는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79년 5기 인민대표대회 2차회의는 선거법을 개정해 현급 인민대표의 무기명투표를 통한 직접ㆍ경쟁선거를 도입, 이듬해 기층인민대표선거를 실시한다. 이 선거에 문혁세대를 비롯한 청년 지식인들이 대거 출마했고, 천쯔밍은 하이덴(海澱)구 인민대표가 된다.

도시의 개혁 개방과 경제 개혁이 본격화한 것도 70년대 말부터였다. 후야오방, 자오쯔양 등의 개혁파와 리펑 천원 등의 보수파간 권력투쟁 등으로 자잘한 부침은 있었지만 중국의 개혁ㆍ개방은 80년대 말까지 기조적으로 이어진다. 86년 4월, 5월 천쯔밍 등 지식인들이 마련한 대규모 정치개혁토론회에는 당시 중앙 당 선전부장이 참석해 개막 연설을 할 정도였다.

1989년 4월. 전 중국 공산당 중앙총서기 후야오방의 급사와 북경지역 대학생들의 추도 행사로 시작된 학생 시위는 10년 동안 쌓인 민주주의의 열망과 경제성장- 통화팽창으로 악화한 빈부격차, 물가상승 불만 등이 겹쳐 거대한 불길로 치솟았다. 베이징 소재 21개 대학은 학생자치연합회를 출범시켰다. 학생 1,000여 명의 텐안먼 광장 단식(5.13)- 지식인들의 잇단 지지성명- 국영기업 노동자와 공무원들의 응원 동참- 자오쯔양 총서기의 단식 중단 광장 설득(5.19), 그리고 5월 20일 계엄령과 유혈사태.

저 다급한 대치 국면에서 천쯔밍과 왕준타오의 드러난 역할은 학생들을 돕기 위한 기부금 모금이었고, 슬로건 선정 등 지도부의 자문에 응하는 수준에 그쳤다. 텐안먼사태의 진실을 알리는 공식 홈페이지 ‘Standoff At Tiananmen’의 ‘텐안먼의 사람들’에는 당시 천쯔밍이 전략적으로 몸을 낮췄다고 기록돼 있다. 상대적으로 전력이 화려한 그로서는 자신이 전면에 나설 경우 학생들의 순수한 뜻이 왜곡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는 초지일관 온건한 개혁주의자였다. 그는 학생 대표단의 단식이 시작된 뒤 한편으로는 단식 중단을 설득했고, 시위대와 정부간 중재역으로 동분서주했다. 또 지식인 집단의 다양한 요구들을 조율하면서 조직 역량 강화에 힘썼다. 스파이 혐의로 5년형을 살고 미국으로 망명, 워싱턴DC에서 ‘중국을 위한 새로운 계획(Initiatives for China)’이라는 시민단체를 이끌고 있는 양지엔리는 “당시 우리에겐 많은 지식인과 조직가가 있었지만, 두 가지 역량을 동시에 지닌 이는 드물었다. 천은 전략과 조직역량을 갖춘 극히 드문 지도자였다”고 LA타임스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뉴욕타임즈 인물 아카이브는 “천쯔밍과 왕준타오는 청년-기성세대를 결합하고, 사회와 대학을 연대하게 하고, 체제 개혁론자와 급진적 민주주의자들을 한 자리에 서게 했다. 그들은 폭력적 파국 없이 중국의 민주화와 근대화를 희망했던 진영의 대표자였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반혁명 선동 혐의로 체포돼 91년 2월 13년 형을 선고 받는다. 법정에서 천은 “우리는 혼란과 폭동에 줄기차게 반대했고, ‘파괴 없이 건설 없다’는 식의 헛소리에 동의하지 않았다”며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부정했다.(‘Bangor Daily News, 2014.10.24) 그의 항소는 기각 당했다.

94년 5월 14일, 천쯔밍은, 20일 앞서 출소한 왕준타오에 이어, 병 보석으로 풀려난다. 텐안먼사태 이후 서방 국가의 경제제재로 헐떡이던 중국이 미국과의 무역재개를 위해 고심하던 시기였고, 2주 뒤 미 하원의 찬반 표결이 예정돼 있던 시점이었다. 왕준타오는 뉴질랜드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다. 하지만 천은 이듬해 6월 4일 중국 정부의 텐안먼사태 사과와 관련자 석방을 요구하며 단식, 다시 투옥된다. 당시 그는 정소암으로 투병 중이었다. 96년 11월 그는 다시 병 보석으로 풀려나는데 당시 중국은 워런 크리스토퍼 미 국무장관의 방문을 2주 앞두고 있었다. 천쯔밍은 형 만기일인 2002년까지 엄격한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고, 형이 끝난 뒤로도 4년간 일체의 언론 접촉을 통제 당했다. 그렇게 연금된 상태로 그는 ‘개혁과 건설(Reform and Construction)’이라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지식인들의 글을 실었고, 수십 개의 가명으로 직접 글을 썼다. 중국 정부는 2005년 8월 서버를 증설하려던 그의 사이트를 일방적으로 폐쇄한다. 2006년 12월 ‘라디오자유아시아(RFA)’인터뷰에서 그는 “그 사이트는 허가 받은 합법 사이트였고, 수많은 이들이 흥미롭고 민감한 글들을 보내왔다. 사이트를 초법적으로 폐쇄하면서 중국의 관련 당국 어디서도 그 사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천쯔밍은 81년 동지였던 왕지홍과 결혼했고, 자녀는 없었다. 왕지홍 역시 텐안먼 사태 직후 1년여 간 옥살이를 한다. 사인은 췌장암이었다. 왕단은 자신의 페이스북으로 천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그는 나의 훌륭한 선생님이자 든든한 친구였다”고 애도했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인터뷰에서는“지난 40여 년간 중국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가장 탁월한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천쯔밍은 왜 망명을 선택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중국인이다. 왜 내가 다른 나라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bangor daily news). 올해 초 그는 중국 정부의 허가로 미국 보스턴에 와서 치료를 받았고, 왕준타오 등 미국에 체류중인 옛 친구들과 해후했다. 그 중 한 명인 망명 활동가 다이 킹은 “그는 학자지만 단 한 권의 책도 출간하지 못했고, 그의 이름으로 어떤 글도 발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조국을 외면하지 않고 베이징에서 죽겠다며 돌아갔다”고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말했다. 다이 킹은 “만약 첸이 평범한 사회에서 살았다면 학문으로든 사업으로든 두드러진 인물이 됐을 것이다”고 말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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