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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한·중·일 삼각무역과 엔저

입력
2014.11.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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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중국과는 사대(事大), 일본ㆍ여진과는 교린(交隣)을 했는데 일본과의 교린도 경제적 형태는 조공무역이었다. 일본이 조공(朝貢)을 바치면 조선은 일본에 회사(回賜)하는 형태였다. 조선이 매년 정월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처럼 왜인들도 매년 정월 조선에 와서 하례했는데, 이때 일본인들은 신임장인 ‘서계(書契)’를 가지고 왔다. 대마도(對馬島)에서 온 사신들은 대마 도주(對馬島主) 소씨(宗氏)가 발행한 서계를, 쇼군(將軍)이 보낸 경우에는 막부가 있는 어소(御所)에서 발행한 서계를 가져왔다. 일본이 물품을 진상하면 조선은 회사(回賜)하는 형태로서 물건 값을 쳐주는 공무역(公貿易)이었다. 그런데 회사, 즉 조공에 대한 물건 값이 늘 문제였다. 세종 30년(1448) 의정부에서 예조의 정문(呈文ㆍ하급관청에서 상급관청에 보내는 문서)에 의거해서 물건 값에 대한 대책을 아뢰었다. 일본인과 여진인이 진상한 물건을 예조에서 품질의 등급을 매기는 간품(看品)을 해서 호조에 보내는 형태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즉 물건 값을 내주는 호조는 물건은 보지도 못하고 예조에서 정한대로 주어야 했다. 그래서 의정부에서는 예조의 담당 낭청(郎廳)뿐만 아니라 호조의 낭청이 시준인(市准人ㆍ시장 상인)을 입회시켜 조공품의 값을 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조ㆍ호조의 담당 낭청과 시장 상인이 물건 값을 정하는 합리적인 형태로 바뀌었지만 물건 값이 마음에 차지 않으면 일본인들은 크게 항의했다. 성종 14년(1483) 검토관 박문간(朴文幹)은 경연에서 “왜인이 진상한 물건의 회사가 넉넉지 못하다고 말과 얼굴에 불평을 나타내고, 잔치를 내려줄 때 노하여 잔치를 받지 아니하는 데 이르렀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물건 값이 마음에 안 든다고 잔치까지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때 일본인들은 진상품을 받는 예조의 관리에게 인정(人情)을 바치는 관례가 있었는데, 인정이란 좋게 말하면 수고비지만 사실상 웃돈이었다. 인정을 바치는 이유는 물론 물건 값을 후하게 받기 위해서였다. 인정을 바쳤는데 물건 값이 원하는 가격에 못 미치면 반발하는 것이었다. 이때 박문간은 성종에게 “예조 관리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게 하자”고 제의했지만 성종은 “왜인이 먼 지방에서 와서 예조를 자신들을 통속(統屬ㆍ관할)하는 관청이라고 하여 정성을 표하는 것이니, 받지 않을 수 없다. 왜인이 물건을 주는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다”(성종실록 14년 11월 3일)라고 거절했다. 조선 초기 일본의 진상품은 은(銀)ㆍ동(銅)ㆍ아연(鉛)ㆍ유황(硫黃) 등의 원료와 소목(蘇木)ㆍ단목(丹木)ㆍ백반(白礬)ㆍ감초(甘草) 등의 약재와 사탕(砂糖)ㆍ후추(胡椒) 등의 기호품과 물소뿔(水牛角)ㆍ상아(象牙) 등의 사치품과 도검(刀劒) 등의 무기류였다. 조선의 회사품(回賜品)은 쌀 같은 식량과 면포(綿布)ㆍ모시(苧布)ㆍ삼베(麻布) 같은 옷감과 인삼(人蔘)ㆍ화문석(花文席ㆍ꽃무늬 돗자리)ㆍ표피(豹皮) 같은 사치품이 있었다. 서적도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대장경의 수요가 많았다.

조선 후기 역관(譯官)들이 국내 제일 갑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수행한 삼각무역이 있었다. 청나라가 해금(海禁)정책을 쓰면서 조선과만 교역했기 때문에 일본 상인들은 동래 왜관에 와서 조선 상인들로부터 청의 물품을 구입해야 했다. 조선 후기 역관들은 동래 왜관에서 일본인들로부터 막대한 은(銀)을 받아 청나라로 가서 물건을 사서 넘겼다. 때로는 동래 왜관에서 취득한 일본의 은을 국고에 넣지 않고 직접 의주로 가져가 청 물품 구입에 사용했다. 국고에는 상당한 시일이 흐른 후에 납입했는데, 그 기간이 역관들은 이익을 남기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런 호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가 운남(雲南)의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 광동(廣東)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복건(福建)의 정남왕(靖南王) 경계무(耿繼茂) 등이 일으킨 ‘삼번(三藩) 의 난’을 진압한 직후인 조선 숙종 10년(1684) 해금(海禁)을 해제하고 마카오(澳門)와 기타의 항구를 개항하는 방향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숙종 11년(1685)에는 복주(福州)와 하문(廈門)의 청나라 상선들이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를 왕래하기 시작했으며, 숙종 15년(1689)에는 나가사키에 청의 상관(商館)이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조선 역관들의 독점 체제였던 삼각무역이 무너지면서 조선역관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일본의 엔저 현상 때문에 한국 수출 기업들의 타격이 크다고 한다. 정부가 각종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지만 청나라의 해금정책 해제처럼 외부에서 결정되는 요인이기에 대응할만한 카드가 마땅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엔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미국이 일본을 끌어들인 측면도 있는데, 중국의존도가 높은 우리는 더 이상의 사태악화를 막는 다양한 대책을 수립하는 것 외에 별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일본의 호시절이 그리 길지 못하리란 사실은 분명하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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