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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동 블루스

입력
2014.11.20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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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을 못 견뎌 분신한 경비원의 근무지는 부자만 모여 산단 서울 압구정동 한 아파트다. 버텨내기 모진 이 일자리는 그러나 떨치기도 쉽잖은 생계 수단이다. 2년여 전 겨울, 이 동네 다른 아파트 노동조합위원장은 새벽부터 단지 내 굴뚝에 올라 경비 업무 외주화에 반대하는 고공농성을 벌였고 용역 전환 유보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9시간 만에 굴뚝을 내려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모멸감을 못 견뎌 분신한 경비원의 근무지는 부자만 모여 산단 서울 압구정동 한 아파트다. 버텨내기 모진 이 일자리는 그러나 떨치기도 쉽잖은 생계 수단이다. 2년여 전 겨울, 이 동네 다른 아파트 노동조합위원장은 새벽부터 단지 내 굴뚝에 올라 경비 업무 외주화에 반대하는 고공농성을 벌였고 용역 전환 유보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9시간 만에 굴뚝을 내려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자선-우연에 기대는 국가는 무책임하다. 부자만 백성으로 여기는 반쪽 정권이나 할 짓이다. 기적 그림자가 짙다. 한몫 잡은 이에게선 국물도 없다. 낙수효과는 허구다. 기울여야 한다.

“1960년대부터 90년대 중반 사이에 우리나라는 두 가지 경제 ‘기적’을 이루었다. 그 기적 중 잘 알려진 것은 고도성장이다. (…) 고도성장보다 덜 알려진 ‘기적’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소득불평등이 악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 한국이 소득분배의 기적을 이룬 것은 다른 선진국처럼 높은 세금과 대규모 복지 지출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부 규제와 기업 관행을 통해 시장의 작동을 억제해 소득격차가 나는 것을 원천 봉쇄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소득분배는 눈에 띄게 악화됐다. 시장이 개방되고 규제가 완화되면서 기업의 행태가 변했기 때문이다. 농업에 대한 보호무역이 점차 약화되면서 소농들이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소매업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면서 소상인들이 도태되기 시작했다. (…) 아직도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원천적인 불평등이 낮은 나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의하면 조세와 복지지출을 통한 소득재분배 이전에는 OECD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가 한국이다. (…) 그러나 우리나라는 복지가 취약하다 보니 소득재분배를 거친 후에는 OECD 34개 회원국 중 불평등도 19위로 평균 이하의 나라가 된다. 다른 나라들이 복지제도를 통해 엄청나게 재분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의 문제는 이렇게 복지제도를 통한 재분배가 취약한 가운데 원천적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각종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경제가 계속 개방되고 있고 국내시장의 규제가 점점 완화되고 있으며 기업문화도 점차 미국식 ‘승자독식’의 문화로 바뀌는 추세다. (…) 불평등이 너무 높아지면 갈등이 심해져 살기에 좋지 않은 사회가 된다. (…) 높은 불평등은 계층이동을 정체시키고, 그를 통해 장기적으로는 경제성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시장을 억제해 불평등을 줄이는 과거의 모델이 붕괴되고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복지국가 확대를 통해 불평등을 줄이는 새로운 모델로 이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복지국가 확대로 불평등 줄여야(중앙일보 ‘장하준 칼럼’ㆍ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 ☞ 전문 보기

“그날 퇴근길에 지나는 압구정동 풍경은 낯설었다. 가로수에 묶어 놓은 검은 펼침막들이 찬바람에 펄럭였다. 노란 은행잎들은 이리저리 쓸려 다니고, 자선냄비 종소리가 바람 속에 흩어졌다. 비인간 취급에 제 몸을 살라 항의한 아파트 경비원도 일터로 가려면 늘 이 길을 지났을 것이다. 그의 장례를 앞두고 걸린 만장 같은 펼침막들과 화려한 백화점 앞뜰의 자선냄비는 서로를 밀쳐내며 비현실적인 풍경을 빚어냈다. ‘한겨레’ 누리집에 실린 포토 인터랙티브 ‘서울 그때 거기’를 보면, 1980년대 초 압구정동은 아파트만 덩그러니 들어선 허허벌판이었다. 오랫동안 배밭을 가꿔온 농촌 마을의 흔적이 흑백사진 속에 남아 있었다. 실로 상전벽해다. 83년 2200달러였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0년 만에 2만5920달러로 치솟은 고도성장은 당시와 현재가 교차하는 풍경 사진 속에 비현실적으로 압축돼 있다. 하지만 놀랍도록 변하지 않은 것도 많다. “하루 24시간의 고된 근무… 보수는 생활급에도 훨씬 못 미치고… 인간적인 대접도 받지 못하고… 언제 해고당할지 몰라 전전긍긍….” 아파트 경비원의 현실을 다룬 82년 ‘경향신문’ 기사는 마치 오늘 써서 32년 전으로 송고한 듯하다. (…) 105만명으로 추산되는 비수급 빈곤층의 삶은 “70~80년대에나 있었던 절대빈곤”(문진영 서강대 교수)이다. 최저기준 이하의 삶이 아직도 이렇게 넘쳐나다니, 성장의 과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 이 도시에 영혼이란 게 있다면, 배밭 일구던 순수한 청년에서 돈을 움켜쥔 교활한 중년으로 타락한 게 틀림없다. 아이들 밥 먹일 재원이 없다더니 ‘묻지마 예산’을 13조원이나 증액하는 사람들이 나라를 이끌고, 외국에선 부자들도 외치는 ‘부자 증세’가 금기어로 묶였다. 그 비정한 거리에서 경비원과 세 모녀와 독거노인과 쫓겨난 비정규직들이 자살하고, 미래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떨고 있다. 경제의 성과를 모든 국민의 인간적인 삶으로 승화시키는 게 국가의 의무라는 것을 옛 성인은 준엄한 비유로 설파했다. “개와 돼지가 사람이 먹을 양식을 먹어도 단속할 줄 모르며, 길에 굶어 죽은 시체가 있어도 창고를 열 줄 모르고, 사람들이 굶어 죽으면 ‘내 탓이 아니다. 흉년 탓이다’라고 하니, 이는 사람을 찔러 죽이고서 ‘내 탓이 아니다. 무기 탓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맹자 양혜왕편) 국가의 부작위 살인을 추궁한 2300년 전 맹자의 혜안은 자선의 종소리만 울려 퍼지는 2014년 이 거리에서 또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2014 겨울, 압구정동 거리에서(11월 19일자 한겨레 ‘아침 햇발’ㆍ박용현 논설위원)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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