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W UR HORN”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표지여서 무슨 의미인지 선뜻 와 닿지 않았다. 자연석 가까운 시멘트에 노랗게 페인트를 칠하고 검정 글씨로 써 놨으니 이건 도로표지판이라기 보다는 장식물에 더 가깝다. 더구나 공식 표지판에 Your도 아닌 UR이라니. 급커브마다 있으니“경적을 울리세요”란 뜻이 분명한데도 터무니없이 자꾸만 ‘혼(魂)을 불러 일으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필리핀 최북단 바타네스는 그런 곳이다. 섬 전체를 통틀어도 몇 대 안 되는 승용차와 밴, 그리고 지프니(트럭을 개조한 필리핀식 버스)와 트라이시클(세발 오토바이)이 아주 띄엄띄엄 다니는, 그래서 커브에서는 꼭 경적을 울리기를 권장하는 곳이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자연과 사람들
필리핀 여행은 골프장이나 카지노를 끼고 있는 멋진 리조트일거라는 생각은 이미 마닐라에서 바탄섬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버렸다. 약 70명을 태울 수 있는 작은 비행기가 1시간 30분간의 비행을 끝내고 바스코 공항에 안착하자 기내에 가벼운 탄성이 퍼졌다. 낮은 구름층을 통과하면서 온몸에 전해지는 흔들거림에 긴장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수도 마닐라에서 850km떨어진 바타네스주(州)는 3개의 유인도와 10여개의 부속도서로 구성돼 있다. 전체 면적이 230㎢지만 수도가 있는 바탄섬은 우리나라 울릉도와 많이 닮았다. 크기(72㎢)와 인구규모(약 1만명)뿐만 아니라 화산섬이라는 것도 닮았다. 울릉도가 우뚝 솟은 성인봉을 중심으로 경사가 가파른데 비해 바탄섬에서는 최고봉인 휴화산 이라야산이 북측으로 치우쳐 있고, 다른 지역은 비교적 평탄하다는 점이 다르다. 또 울릉도의 바다가 경사가 가파른 만큼이나 바로 수심이 깊지만 이곳 바다는 산호층이 넓게 발달해 웬만한 파도는 해변에 닿기도 전에 잔물결로 변한다는 것도 다르다.
바타네스는 사람도 자연도 아직 문명의 때를 많이 타지 않은 곳이다. 바닷가에서 반쯤 스러진 야자나무 잎사귀를 미끄럼틀 삼아 놀던 어린아이는 이름이 뭔지 물어도 대꾸없이 미끄럼 실력을 보여주려는 듯 더욱 빠르게 잎사귀를 타고 내려간다.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들이대자 당당하게 V자를 그려 보인다. 그제서야 경계심을 푼 얼굴에 웃음기가 비친다.
삿갓처럼 항상 정상에 둥근 구름을 두르고 있는 이라야산을 배경으로 잔디밭에서 뛰어 놀던 초등학교 상급생 아이들은 카메라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저마다 모델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리고 나선 어디서 왔냐? 어떻게 왔냐? 등 되레 질문공세다. 아직까지 흔치 않은 외지인이 아이들의 눈에는 몹시도 궁금한 것 같았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어른들도 누구 하나 찡그리거나 피하지 않고 가볍게 눈인사를 하거나 밝은 얼굴로‘헬로’하며 먼저 인사를 건네는 곳, 바타네스는 아직 그런 곳이다.
한번은 바스코 언덕에서 만찬이 너무나 분위기가 좋아 예정시간보다 한 시간 이상 늦어졌다. 하지만 식탁과 의자를 준비하고 음식을 차리는 주민들 어느 누구도 불만스런 표정이 없었다. 이국적인 풍경 속에 별빛만찬을 즐기는 여행객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볼만한 풍경이었나 보다. 바스코 언덕에서 석양을 배경으로 오토바이에 올라 휴대전화로 심각하게(실제로는 뒷모습만 봐서 얼굴표정까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화를 나눈 후 돌아서는 청년의 모습이 쓸쓸하다. 대도시로 나간 친구가 그리웠나 보다. 청년들에게 섬은 너무 좁고 갑갑하다. 거리낌없이 젊음을 발산할 수 있는 마닐라 같은 대도시를 동경하고 있는지 모른다.
뜨거운 날씨에 도로 포장공사를 하는 인부들의 얼굴에도 짜증보다는 웃음기가 묻어있다. 왕복2차선이라고 하기에도 좁은 도로를 보수하는 작업이 여러 곳이다. 통행을 막지 않으려 절반으로 쪼개서 공사한다.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공사시작점에서 멈춰서 기다린다. 덕분에 차선이 줄어든 곳에서도 후진을 하는 낭패를 겪는 일이 없었다. 작은 틈바구니만 생기면 차를 세로로 접는 마법이라도 부리듯 악다구니 쓰며 끼어드는 마닐라보다 훨씬 넉넉하고 성숙해 보였다. 교행하는 중에도 잠시 차를 멈춰 운전자들끼리 한 마디라도 주고받고 헤어질 만큼 섬 사람들은 서로 잘 알고 지내기 때문에 범죄도 거의 없단다.
누렇게 단풍이 들어 자연스럽게 떨어진 카바야 잎은 그대로 부채가 되고, 좀 더 넓은 잎은 햇빛을 가리는 양산이 된다. 물기를 머금은 싱싱한 잎은 음식을 찌는 보자기가 된다. 우리의 연잎밥과 꼭 닮았다.
이곳에선 꼭 봐야 할 그 무엇도 없고, 꼭 해봐야 할 즐길 거리도 없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10선’ ‘30살이 되기 전에 꼭 해봐야 할 20가지’등등 이런 의무감이 싫은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곳이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해변을 산책해도 좋고, 심심하면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주민들과 되지도 않는 영어로 말동무를 해도 좋고, 스스럼없이 다가서는 아이들과 놀이를 해도 좋다. 운전기사까지 딸린 차를 하나 빌리면 해안도로를 따라 경치 좋은 곳에서 사진도 찍고, 파도가 잔잔한 해변에서 수영도 하고, 소와 말이 뛰노는 목장을 거닐며 한가하게 소풍을 즐길 수도 있다.
어느 마을이고 오래된(대부분 1800년대에 세워진) 성당이 있다는 점은 아시아 최대의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의 특징이다. 교회 문은 항상 열려있다. 종교가 있든 없든 누구나 예배당 안에 들어갈 수 있다. 경건한 자세만 갖는다면 기도의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이 없겠다. 무료함에 지쳐 바스코 시내에서 레저용 사륜 오토바이를 빌리면, 공항 활주로에서 마음껏 달려볼 수도 있다. 하루 한편 있는 비행기가 아침 일찍 떠나면 공항은 하루 종일 텅 비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이 저물면 서쪽 바다가 잘 보이는 바스코 언덕에 올라 석양을 바라보며 아득한 추억에 잠긴 후 쏟아지는 별빛을 친구 삼아 호텔로 돌아오면 될 일이다.
호텔이라고 특별히 즐길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필리핀산 산미구엘 맥주나, 커피 한잔 시켜놓고 일행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게 전부다. 호텔이 좀 허름하면 어떤가? 잠자리에 불편이 없을 만큼 충분히 깔끔하다. 멋진 수영장이나 골프장이 달린 리조트가 아니면 어떤가? 맑고 푸른 바다가 모두 천연 해수욕장이고, 온통 푸른 목장이 지천인 것을. 제한속도인 시속 40km이상으로 달릴 만큼 도로가 충분히 넓어야 할 이유도 없다. 섬 어느 지역에서든 30~40분이면 공항에 도달할 만큼 도로는 마을 안길까지 깔끔히 포장돼 있다.
새로운 관광지로 키우고 싶은 필리핀관광청의 초청의도와 달리 떠날 무렵이 되자 이곳은 이대로 두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앞선다. 아직은 순수함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바타네스의 혼(魂)이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도록.
바타네스(필리핀)=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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