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느다란 잎맥ㆍ곤충의 겹눈...
극도로 정교한 밑그림에 색칠하는
어른들을 위한 컬러링 북
스트레스 해소 효과에 폭발적 인기
유명 작가와 시대의 지성이 자웅을 겨루는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몇 주 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책 한 권이 꽂혔다. 영국 일러스트레이터 조해너 배스포드가 지은 ‘비밀의 정원’은 어른들을 위한 색칠놀이 책이다. 꽃, 나무, 동물, 벌레의 밑그림을 극도로 정교하게 그려놓은 것으로, 척 봐도 아동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느다란 잎맥과 칸칸이 나뉜 나비 날개와 곤충의 겹눈에 색을 칠해 넣는 쾌감이 어찌나 컸던지, ‘비밀의 정원’은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3주간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 8곳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한국출판인회의 집계).
어른들을 위한 컬러링 북 열풍이 시작된 곳은 프랑스다. ‘비밀의 정원’이 처음 출간된 영국에서는 정작 별 반응이 없었으나 책이 프랑스어로 번역되고 현지 출판사에서 ‘안티 스트레스’라는 개념을 덧입히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십자수나 뜨개질처럼 단순 노동을 제공해 거기 몰입해 있는 동안만이라도 세상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색칠놀이 책이 스트레스에 찌든 성인들에게 제대로 먹혀 든 것이다.
‘비밀의 정원’은 8월 말 현재 14개국 언어로 번역됐으며 미국에서 13만부, 영국에서 10만부라는 판매고를 올렸다. 한국에서도 8월말 출간 이후 지금까지 12쇄를 찍으며 14만부나 팔려 나갔다. 일부 서점에서 독일 미술용품 업체 파버 카스텔의 36색 색연필과 ‘비밀의 정원’을 세트로 묶어 파는 기획을 했는데 색연필이 동나는 바람에 부랴부랴 다른 상품으로 대체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비밀의 정원’을 출간한 출판사 클의 김경태 대표는 “프랑스에서는 1, 2년 전 컬러링 북 열풍이 시작돼 지금은 하나의 장르로 안착했다”며 “출시되는 컬러링 북 중 거의 100%가 안티 스트레스를 내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조해너 배스포드가 원래 치유를 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아닌데 안티 스트레스 그림의 선두주자처럼 됐으니 재미 있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비밀의 정원’이 인기를 끌자 다른 출판사들도 앞다퉈 컬러링 북을 내놓고 있다. 8월부터 11월 중순까지 출간된 어른용 색칠놀이책은 20여종. 11월에만 10종이 나왔다. 그림의 종류도 점점 다양해져 꽃이나 동물 그림에서 컵케이크, 서커스, 명화, 도시, 만다라 문양 등으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노린 ‘컬러풀 크리스마스’(웅진리빙하우스)도 출간됐다.
어떤 책은 색깔 선택의 고민이 되려 스트레스를 가중시킬까 봐 그림의 일부를 채색해놓았고 어떤 책은 종이를 두껍게 만들어 ‘채색한 뒤 뜯어서 간직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출판사 클도 이달 말 ‘비밀의 정원’ 엽서판을 출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친구에게 보내거나 벽에 붙여둘 수 있는 엽서 형태로 제작됐다.
컬러링 북 열풍에 불을 당기는 또 다른 요인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자신이 칠한 그림을 올려 공유하는 것이 유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책 홍보가 이뤄지는 것. 예술?대중문화 분야 베스트셀러의 절반 가량이 컬러링 북으로 채워지자 교보문고를 비롯한 대형 서점들은 아예 별도의 코너를 만들기도 했다.
때아닌 어른들의 색칠놀이 열풍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풀 돈도, 시간도 없는 대한민국의 지친 성인들은 오늘도 서점가의 컬러링 북 코너를 기웃댄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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