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 다급한 방송에도 車 안 멈춰 가까스로 길 열리자 끼어들기도
언론서 길 터주기 중요성 다뤘지만 소방관들 "아직 체감 어렵다"
“정지! 정지! 봉고차 정지하세요!”선두에 선 소방 지휘차에서 나오는 다급한 교통 통제방송과 사이렌 소리에도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들의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편도 4차선인 서울 중랑구 신내동 능산로 사거리에서 차량 꼬리물기에 막힌 지휘차는 좌회전을 하지 못하고 결국 급정지 해야 했다. 봉고차 운전자가 멋쩍은 듯 웃으며 미안하다는 표시로 손을 들어 보이고 지나간 다음에야 소방차 행렬은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11월 불조심 강조의 달을 맞아 중랑소방서는 ‘119 황금시간 목표 달성 소방차 길 터주기’ 캠페인을 마련했다. 그 일환으로 17일 오전 지휘차를 포함, 소방차 9대가 중랑소방서를 출발해 중랑구청 사거리, 중화역 사거리, 용마산로 등을 거쳐 20여분간 실제와 같은 기동훈련을 했다. 상황의 심각함을 알리기 위해 지휘차에는 기자, 택시ㆍ버스 기사, 시민 외에도 골든 타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수술실 간호사 등 10여명이 탑승했다.
능산로 사거리를 통과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2분. 통상적인 골든 타임이 5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절반 가까운 시간을 사거리 하나 건너는 데 허비한 것이다. 지휘차에 탄 김희성(48) 소방위는 “출ㆍ퇴근 시간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양반”이라며 “하루에 서너 번 출동하는데 5분 내 현장에 도착하기는 거의 어렵다”고 말했다.
통계를 보면 상황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서울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화재 현장까지 도착하는 데 5분이 넘은 건수는 2011년 120건, 2012년 122건, 2013년 175건, 올해는 8월말까지만 해도 447건으로 급증했다.
올 초부터 부산판 ‘모세의 기적’, 독일판 ‘모세의 기적’ 등 긴급차량에 길을 내주는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의 인식은 여전히 ‘내 갈 길이 먼저’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김 소방위는 “119 길 터주기의 중요성이 언론에 셀 수도 없이 보도됐지만 소방관 입장에서는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체감하기 어렵다”며 “길을 양보하지 않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는 듯하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소방차가 상봉 삼거리에 진입할 무렵에는 비켜선 차들로 소방차 앞 길이 열리자 그 틈을 비집고 하얀색 승용차가 끼어들기도 했다. 지휘차 안에서는 ‘해도 너무 한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인성 개인택시운송조합 중랑지부장은 “소방차나 구급차에 대한 시민의식이 이렇게 낮은지 미처 몰랐다”며 “3,500여명에 달하는 중랑구 택시 기사들이라도 소방차 길 터주기에 앞장서도록 전도사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소방차나 구급차 길 터주기는 사람의 생명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서울동부제일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는 권은정 간호사는 “교통사고로 뇌 손상을 입은 환자를 싣고 가는 응급차의 경우 5분 안에 응급실에 도착할 수 있는지 여부가 환자의 생사를 가를 수 있다. 시민의식이 좀 더 개선돼야 하겠다”며 안타까워했다.
중랑구민 문성오(49)씨도 골든 타임의 중요성에 공감했다. 문씨는 “올해 초 친한 친구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119에 신고했는데 내가 친구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구급차가 오지 않았다”며 “빈혈로 쓰러졌다는 진단을 받고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심장마비 같은 이유였다면 큰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소방 관계자들뿐 아니라 지휘차에 탔던 사람들은 소방차 길 터주기처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캠페인으로 해야 한다는 현실에 한숨을 지었다. 김선영 중랑소방서장은 “캠페인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구급차 ‘모세의 기적’을 기적이 아닌 일상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민정기자 fac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