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가 올챙이 적을 왜 기억해야 하지?” 이번 작품에 나왔던 대사다. 그런데 며칠 전 회식자리에서 딱, 공황상태에 빠졌다. 올챙이 적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개구리로서의 명분만 찾고 싶었다. 기성세대이고 싶었을까.
종연 후, 젊은 배우 몇이 자신들의 소회를 말하던 중에 맡은 역할에 대해 깊은 신뢰가 없이 말하는 게 그 발단. 가령 자신의 역이 작았다거나, 내가 맡은 역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거나, 커튼 콜 때 나오기가 민망했다거나, 갓 들어온 친구가 잡일을 했었다고 말하거나. 나는 대번에 기분이 나빠졌다. 상처를 받았다고 해야 더 맞다. 그 말들에 베였다. 나는 그네들에게 분명한 역할을 맡겼다고 여지없이 믿고 있었고 그들이 무대를 뒷정리하는 모습에 감동까지 받았었다. 그런데 아닌 모양이었다. 종연파티자리만 아니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한바탕 들었다 놨을 판.
역할이 작아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한다. 맡은 역할을 모르겠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처럼 느껴진다. 커튼 콜 때 나오기 싫으면 나오지 마라. 잡일이라고 생각돼 자존심이 상한다면 말면 그 뿐이다. 극단에서 할 수 있는 극단적인 말이다. 그것이 가장 낫다. 행복하려고 연극을 하는데 왜 마지막의 순간에 당혹스런 원망을 뱉어 내는가. 중간에는 말을 할 수 없었다고?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아니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 다른 길을 찾아가면 바로 된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배우는 그러면 안 된다. 미안하지만 배우는 사람이 아니다. 배우라면 그 안에서 길을 내고, 명분을 찾아야 한다. 연습이 시작되고 나면 이미 배는 뭍을 박차고 항해를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항구로 다시 못 돌아간다. 단역이라도 캐스팅을 번복할 수 없다. 정히 못하겠다면 사전에 동의를 얻어 다른 데서 사람을 구하게 할 일이다. 그 다음에 알게 모르게 흐를 냉랭한 기운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그러는 편이, 하면서 불만에 가득 찬 인생보다는 서로에게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수해보자 생각했다면 선택은 하나다. 기분 좋게 노를 젓기. 낙관 혹은 긍정.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폭탄 같은 발언은 깊은 상처를 남기고 지나간 추억 전체를 멍들게 한다.
극단초창기 때 공연을 잘 끝낸 어느 회식 자리에서 몇이 극단을 떠났다. 영문도 잘 모른 채 당황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까닭이나 알자며. 그래도 그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패닉 상태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한 체 나의 부덕만 탓했다. 이번도 마찬가지. 왜 그들이 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잘 몰랐다. 그런데 노련해진 탓일까. 이제는 별로 알고 싶지 않고 죄의식도 잘 안 생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그런 역할을 주지 않겠다, 그런 일도 시키지 않겠다, 이제부터 의리 같은 것은 그만두고 서로 이해득실을 따지는 사무적인 관계로 가자, 이렇게만 말하고 싶었다. 나는 근사한 개구리가 되어 있었다.
올챙이 적으로 돌아가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소한 불만이란 걸 잘 안다. 허나 내가 개구리가 된 이상에는 양보하고 싶지 않다. 마지막 말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말, 하지 않고는 못 참겠다. 행복한 여행이었다고 굳게 믿는 마지막 순간에 이번 여행은 영 아니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여행 중에 짬짬이 말했어야 옳다.
이 참에 고백도 해야겠다. 요 몇 달간에 나는 행복했노라 철석같이 믿고 지냈는데 마지막 이별장면에서 비수처럼 꽂히는 말을 몇 번 들었다. 그러다 보니 은근 부아가 자라났다. 이제는 그게 내 탓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불행했던 순간순간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때그때 풀면 좀 좋으랴. 불만을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나중에 꺼내는 일, 참 안 좋다. 당사자는 참고 참다 이야기 한다지만 상대방은 그런 그이가 야속하기 그지없다. 개구리니까 올챙이를 양해하라고?
불만에 찬 내 열변을 다 듣고 술친구 유씨가 간단하게 일갈했다. 그런 당신은 왜 그때 곧장 얘기하지 않았어? 무조건 낙관하고 긍정하라며? 아뿔싸, 통재라! 올챙이도 아닌 것이 더군다나 개구리도 아니었구나. 아직도 나는 당당 멀었구나, 허허.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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