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踏査)는 전문가들의 영역이었습니다. 건축, 문화, 도시, 조경 등 전문가들은 교육과 연구를 위해 현장에서 지혜를 얻고자 특별한 여행이나 방문을 하곤 하는 것이 답사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서울의 골목길 답사 모임에는 건축, 도시 디자인 전문가는 물론이고 미술과 음악 같은 예술가와 소설가, 방송작가, 그리고 사회복지사와 컴퓨터 엔지니어, 심지어 국어선생님도 계셨고 세탁소 사장님도 계셨습니다. 그분들은 SNS를 통해 수시로 연락하고 서울의 이름 모를 골목길들을 찾아 떠나고 서로 이야기하며 사진도 찍곤 합니다. 그리고 가끔 전문가들을 통해 배움을 청하기도 합니다.
별 헤는 밤 고뇌하며 윤동주(尹東柱)가 걷던 길을 찾기도 하고, 겨드랑이에서 날개야 돋으라며 외치던 이상(李箱)의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 백화점) 자리를 찾기도 하며, 어릴 적 뛰어 놀았음직한 담벼락과 기억의 풍경이 남은 오래된 길을 찾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전태일(全泰壹)과 같은 시대의 고통을 담은 길과 이제는 사라져갈 골목시장의 모퉁이 골목길을, 그리고 재개발이 시작돼 잊힐 달동네 길을 찾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도대체 이들은 왜 골목길을 찾고 골목길을 이야기할까? 이 질문에 모인 이들은 여가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기억과 기록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사라져갈 것에 대한 짙은 아쉬움과 성숙한 인류가 지켜야 할 가치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 끝없는 배움을 이야기하며 지성을 논하기도 했습니다. 서로 살아가는 터전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모이고 떠나며 살피는 노력의 가치도 모두 다른 이들은 주말마다 각양각색의 카메라와 기록노트를 가지고 자유롭게 모이고 떠나기를 반복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반복해서 정부에서 일하는 관료들에게 자문을 하고, 학술용역이라는 이름으로 지역재생과 낙후된 지역의 활성화를 연구하는 저 같은 전문가에게 답사라는 현장 학습의 기회는 일상이고 게으름을 피우지 말아야 할 지혜의 노력입니다.
하지만 서로 삶의 배경도 다르고 문화적 이해도 가치도 다른 이들이 답사라는 방법을 통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오래된 골목길을 찾는 모습은 재미를 넘어 새로운 풍속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골목길은 어디에나 있고 쉽게 보이지만 그 길에 쌓인 시간과 사건, 그리고 기억할 만한 흔적들을 찾아낸다는 것은 각별한 관심이나 노력 없이는 쉽지 않거든요. 그저 카메라를 둘러메고 길을 떠난다고 그런 것이 보이고 들리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 골목길의 가치 있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서로의 오래된 기억들을 들추고 이야기해야 하고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오랜 시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따뜻한 시선과 마음으로 불편하고 어쩌면 지저분해서 버려야 할지도 모를 모습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흔적을 찾아내고 바라보며 이해의 관점이 달라지면 어제의 지나쳤던 길들이 다르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길은 어머니와 손잡고 걸었을 시장 길이고 아름다운 청춘시절 첫사랑과 걸었던 추억의 길과 같은 개인적인 풍경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어떤 골목길은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할 가치 있는 유산으로 보이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어린 세종대왕이 걸었을지도 모르는 서촌의 어느 길, 청년 김두환이 한판 멋진 활극을 벌였을 종로 뒷길, 민주화의 구호와 매콤한 최루가스 속의 명동성당 언덕길이라면 두고두고 다음 세대에게 들려줘야 할 길의 소리일 테니까요.
이처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가치는 박물관의 유리장안에 있는 유물들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며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아갈 작은 골목길 속의 기억과 흔적이 박물관의 어떤 유물보다도 중요할지 모릅니다. 오늘 여러분이 서있는 길은 무슨 길이었습니까.
홍의택 가천대 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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