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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아는 현대음악? 즐기고 싶으면 공부해야죠

입력
2014.11.1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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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숙은 "많은 사람이 현대음악과 친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아르스 노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받는 후원금을 '아르스 노바'에 지원하는 것도 그런 바람 때문이다. 왕태석기자 kingwang@hk.co.kr
진은숙은 "많은 사람이 현대음악과 친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아르스 노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받는 후원금을 '아르스 노바'에 지원하는 것도 그런 바람 때문이다. 왕태석기자 kingwang@hk.co.kr

한국에서 이 놀라운 곡들이 언제 다 연주됐을까. 서울시향이 제시하는 ‘아르스 노바’의 공연 목록은 낯선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 현대음악이란 이름으로 다가온 그 낯섦은 미지와의 조우이면서, 데면데면한 우리의 무지와 대면하게 한 계기였다. 우리의 문화 상황과 아귀가 맞지 않은 것 같기도 하지만 8년째 이어오는 이 연주회는 상품이 아닌 예술을 문득 생각하게 만든다.

약간은 철 지난 구조주의의 어법을 빌면 재독 작곡가 잔은숙(53)은 한국의 문화적 아귀에서 벗어난, 이른바 ‘탈구(脫臼ㆍdislocation)’된 사람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선머슴 같은 웃음을 지어가며 나라밖 동시대 클래식의 풍경을 이웃 동네 일처럼 전하고 있다.

9월 22일자 뉴욕타임스가 할애한 진은숙 특집 기사는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미국 언론의 공개비망록이다. 특집기사는 1985년 스물 넷의 나이로 독일 함부르크에 당차게 입성한 이 작곡가의 진실이 있다면 “끝까지 고정관념을 배반하리라는 것”이라고 적었다.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인 그는 ‘아르스 노바’를 진행하기 위해 매년 네 차례 정도 한국을 찾는다. ‘아르스 노바’는 한국 유일의 오케스트라 현대음악 무대로 세계 초연 또는 한국 초연 작품 등 평소 접하기 힘든 곡을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올해 ‘아르스 노바’를 위해 서울을 찾은 그를 만났다. 진은숙은 인터뷰가 끝난 뒤 가족이 있는 독일로 돌아갔다.

_작곡계의 노벨상이라는 그라베마이어상을 포함해 아널드 쇤베르크상, 피에르 대공 작곡상 등 권위 있는 작곡상을 연거푸 수상함으로써 세계 작곡계의 최정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당신이 하는 현대음악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모른다. 현대음악을 1%만이 아는 음악, 1%만이 즐기는 음악이라는 지적이 있다.

“현대음악이 대중적이지 않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리고 음악에서 대중의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대중이 온전히 향유하는 것만 가치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왜 하나. 철학이 대중적이지 않다고 해서 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순위를 매겨 모든 분야의 중요성을 판단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_현대음악을 생산하는 주체로서 약간의 뻔뻔스러움이 있어야 한다는 뜻 같기도 하다.

“물론이다. 예술가는 남의 이해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무엇을 할 것이냐, 나의 아이디어가 무엇이냐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약간은 뻔뻔하게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_그렇더라도 기왕이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음악을 해야 하지 않을까.

“당연한 지적이다. 그러나 음악을 듣는 데도 약간의 노력, 약간의 공부가 필요한 것 같다. 음악뿐 아니라 다른 예술도 소비자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1년에 서너 차례 한국으로 와 ‘아르스 노바’ 활동을 하는 것은 한국의 대중이 음악을 이해하는 약간의 노력을 할 계기를 마련해주고 싶어서다.”

_현대 예술이 난해하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 중 하나로 일반인과의 소통 부재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사회 불평등이나 여성 문제처럼 많은 사람이 고민하는 테마의 곡을 만들면 일반인이 좀 더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음악이 사회 문제를 다룰 수는 있다. 그러나 음악은 추상의 영역이며 그것만의 세계가 따로 있다. 같은 음악이라도 노래곡이나 오페라라면 메시지 담기가 조금 쉬울 것이다. 그러나 작곡은 사회 문제를 다루는데 약간 어려움이 있다.”

_일반인이 낯설다고 하는 현대음악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에 따른 부담은 없나.

“내가 얼마나 유명한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내가 만든 곡에 대한 평이나 신문기사가 나와도 잘 읽지 않는다. 그렇지만 작곡가로서 내가 세운 잣대에 이르지 못했을 때는 창피하고, 나 자신이 실망스러워진다.”

_작곡하는 게 힘들다면서 스스로를 벌레에 비유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 작곡을 한다고는 하는데 잘 안될 때 내가 벌레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곡을 완성하고 그 곡이 좋게 연주가 되면 내가 벌레는 아니구나 하는 안도가 든다. 반대로 연주되는 내 곡이 기대에 못 미칠 때는 내가 진짜 벌레라는 생각을 한다.”

_그런 경험이 실제로 있나.

“1993년 도쿄 국제콩쿠르에 나가서 1등을 했는데 상금이 어마어마했다. 경제적으로 힘들 때여서 상금이 큰 도움이 됐지만 곡이 마음에 안 들어 다시는 연주를 못하게 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내 곡이 1994년 처음 연주됐다. 그 음악을 듣고 있는데 완전히 망친 것 같아 술에 취하기도 했다.”

_작곡할 때 뭐가 그렇게 힘이 드나.

“곡을 만들 때는 인생을 쏟아 붓는다. 그러나 작곡은 인풋과 아웃풋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 곡을 만드는 사람이 100만 명이라고 해도 명성을 얻거나 곡을 써달라는 의뢰를 계속 받는 작곡가는 10명이 안 된다. 그러니 기대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힘이 든다.”

_그래서 먹고 살만 하면 작곡을 때려치우겠다고 했는가.

“예술가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한다. 스트라빈스키는 작곡을 하겠다며 찾아온 사람에게 지금 하는 일로 100만 달러를 벌 수 있다면 작곡하지 말라고 했다. 나도 학생들에게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면 작곡을 하지 말라고 그런다. 앞서 말했듯 인풋은 많은데 아웃풋이 너무 적다. 한번뿐인 인생을 그런 일 하면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_곡에 독창성이나 개성은 어떤 식으로 부여하나.

“어떤 곡에서든 자신만의 언어를 드러내는 작곡가가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나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러다 보니 곡을 만들 때마다 입히는 색이 달라지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하지 않았던 것을 시도하려고는 한다. 전문가뿐 아니라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무엇인가를 알아챌 수 있는 음악을 만들려고 한다.”

_작곡을 하자면 영감이나 아이디어가 풍부해야 할텐데.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그림과 영화를 보고 책을 읽다 보면 나름의 아이디어가 생긴다.”

_’아르스 노바’ 프로그램에서 물질적 기반이 중요한가.

“당연하다. ‘아르스 노바’ 프로그램은 수준이 상당히 높다. 아시아에서 이렇게 하는 오케스트라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는 서울시향의 국제적 위상을 모르는 것 같다. 해외에서는 엄청나게 각광 받고 있다. 사실 오케스트라는 한국을 홍보하는데 너무나 좋은 매체다. 스포츠 예산의 1%도 안 되는 돈만 써도 된다.”

_스승인 강석희 교수도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강 교수의 앞 세대에 윤이상이 있다. 그렇다면 윤이상-강석희-진은숙으로 미학적 계보도를 그릴 수 있겠는가.

“윤이상 선생님은 동양에서 서양식 작곡을 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유럽에서 엄청난 업적과 커리어를 쌓았다. 지금 한국 음악 활동 대부분의 기초를 윤이상 선생님이 다졌다고 할 수 있다. 강석희 선생님 역시 독일에서 활동하며 윤이상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윤이상 선생님은 한국으로 들어오지 못했지만 강석희 선생님은 한국으로 돌아와 판뮤직 페스티벌을 했고 제자를 가르쳤다. 강석희 선생님의 제자 0순위가 바로 나다. 그를 안 만났다면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_강석희 선생에게서 주로 무엇을 배웠는가.

“유럽에서 활동하던 음악인이 한국으로 귀환한 사례가 거의 없었다. 강 선생님이 낯설고 신기한 음악을 소개했고 테크닉과 관련한 것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내게 ‘너는 국내 콩쿠르에 나가지 말고 국제 콩쿠르에 나가라’고 말씀했다. 그래서 나의 눈높이가 높아졌다. 강 선생님의 제자 자랑은 옆에서 듣기에 민망할 정도다.”

_독일 유학도 강석희 선생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

“그렇다. 내게 유학 가라고 했고 장학금을 받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일했던 베를린공대 전자음악스튜디오에서 나도 공부했다. 강 선생님 세대만 해도 한국 사람은 국제적으로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내 세대도 쉽지 않았고. 하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훨씬 편하다. 물론 그들이 내 나이가 돼야 진짜 비중 있는 음악인이 됐는지 판가름 날 것이다. 젊은 세대 가운데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정말로 대단하다. 국내파로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됐으니 그의 등장은 한국 음악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_강 선생을 사사한 뒤 독일로 건너가 세계적 작곡가인 죄르지 리게티 문하에서 공부했다. 리게티가 무슨 말을 했는가.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은 하지 마라고 했다. 나만의 것을 하라고 강조했다.”

_대학 동창인 홍승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대학 시절의 진은숙 감독에 대해 “바흐의 첼로 모음곡 ‘프렐류드’를 딱 한번 듣고 오선지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고 쓴 글이 있더라.

“그런 기억이 없다. 그가 나를 전설로 만들었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_타고났다고 생각하는가, 노력파라고 생각하는가.

“세상 일은 어느 정도 타고 나야 잘 할 수 있는 것 같다.”

_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했는데 음악이 지겨운 적은 없었나.

“아주 어려서부터 음악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작곡 하는 것은 힘들지만 음악을 향유하는 것, 피아노 치고 음악 듣는 것이야 말로 정말 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_피아노를 하다가 왜 작곡으로 돌아섰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레슨을 못 받았다. 금란여중 다닐 때 방과 후 인근 이화여대 음대에 가서 대학생들 연습 하는 것을 몇 시간씩 보았다. 대학생들 졸업 연주회도 갔다.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이 작곡과 출신이었는데 하루는 나를 부르더니 ‘작곡을 해라’ ‘작곡하는 게 훨씬 좋다’고 했다. 그때 마침 정명훈 선생이 피아노로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2등을 하고 카퍼레이드 하는 것을 보며 아, 나는 이미 늦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중 2 때 피아노 포기하고 작곡으로 돌아섰다.”

_정명훈 서울시향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과 인연이 깊은 것 같다.

“정명훈 선생이 1970년대에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쇼핑 소나타 2번 연주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서울시향에 합류한 것도 정 선생의 권유 때문이다. 요즘이야 정 선생과 밥도 같이 먹고 그러는데 그게 지금도 꿈만 같다.”

_클래식만 듣는가.

“음악은 다 듣는다. 어렸을 때는 팝송도 좋아했다. 지금은 각국의 민속음악과 재즈도 좋다. 한국 아이돌 가수들 공연도 보았다. 비 공연을 본 적이 있고 수원까지 내려가 (소리꾼) 이자람 공연을 보기도 했다.”

_작곡가로서 필생의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곡이 있는가.

“이자람 공연을 본 뒤 판소리 등 한국식 창법으로 노래하는 사람과 함께 이제껏 한번도 한 적이 없는 장르의 음악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런데 그것을 하려면 엄청나게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

_쟁쟁한 형제를 두었다. 언니가 음악평론가 진회숙이고 동생이 진중권이다. 다들 개인주의자니 자유주의자니 그러는데.

“각자의 삶을 존중한다. 그러다 보니 연락도 잘 안하고 함께 모이는 일도 드물다. 이번에 한국에 와서는 아직 중권이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중권이는 본 지가 오래됐다. 그래도 중권이와는 형제 중 내가 가장 비슷하다. 하지만 닮았다고 하면 서로 모욕이라고 생각한다(웃음). 언젠가 뉴욕에 갔을 때 한 기자가 중권이에 대해 말하길래 그래도 동생이라 모른 체 할 수 없어 그냥 착한 동생이라고 했더니 ‘진중권 동생은 착한 사람, 오해가 안타까워’라는 식으로 기사가 나와 나도 어리둥절했다. 내가 시시콜콜 이야기를 하지 않아 엄마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강은영기자 kiss@hk.co.kr

연다혜 인턴기자(경희대 언론정보학과 3년)

▶ 진은숙은 누구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서양 고전음악과 피아노를 접하고 베토벤과 브람스의 음악을 들었다. 중학교 시절 피아노를 독학하던 중 음악 선생님의 제안에 따라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악보를 살 형편이 되지 않아 차이콥스키, 스트라빈스키 등의 교향곡 악보를 베끼면서 공부했다.

서울대 작곡과에서 강석희를 사사했다. 독일에서 공부한 강석희의 영향을 받아 1985년 장학금을 받고 현지로 건너가 헝가리 출신 작곡가 죄르지 리게티 밑에서 공부했다. 이후 현재까지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다.

베를린 도이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초청작곡가로 위촉돼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음악계의 노벨상이라는 그라베마이어상을 2004년 수상하며 세계 최고 작곡가 반열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생존 작곡가에게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아널드 쇤베르크상을 수상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인 사이먼 래틀은 진은숙을 ‘세계 작곡계를 이끌 차세대 5인 중 한 명’으로 지목했다.

2006년부터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 겸 ‘아르스 노바’ 시리즈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0년부터는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오늘의 음악’ 예술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핀란드 출신 피아니스트인 마리스 고토니와 결혼해 아들을 두고 있다. 시아버지인 랄프 고토니 역시 저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다.

연다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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