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 전 모네 그림을 마주한 때부터이다. 시간이 애매해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시카고 아트 뮤지엄에 무심코 들렀다. 그 곳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 있었다. 모네의 ‘건초더미(grainstack)’시리즈였다. 따듯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 그림이 너무 좋아 자리를 뜨기 싫었다는 점이다. 그저 그 앞에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그 이후 학회나 여행을 가면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근처 미술관을 들르기 시작했다. 아는 것 없이 그림 보는 것만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사실 그때는 그게 모네인지 마네인지도 몰랐다. 이 이야기를 우연히 사적인 식사 자리에서 했더니 알려진 화가 한 분이 칸딘스키 이야기를 하셨다. 바로 이 작품, ‘건초더미’에 매료돼 법학자인 칸딘스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화가로 전향했다는 거다. 이 작품이 칸딘스키의 마음도 흔들었던 것이리라. 이렇듯 여러 사람의 마음에 뭔가 울림을 주는 작품을 그린 사람이 바로 모네다.
모네의 인생은 평탄치 않았다. 초기에는 재정적인 어려움 등으로 절망하여 센강에 자살 시도까지 했다. 좌절과 분노로 충동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행동 때문에 자신의 작품 500여 점을 불태우거나 잘라 부셔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 생애에 걸쳐 지속적으로 우울증을 겪고 살았다. 두 아내와 아들의 사망으로 절망과 우울이 더욱 심해지게 된 모네는 마음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 파리 근교의 지베르니로 이사를 하고 마당에 일본식 정원을 가꾼다. 43년 동안 지베르니의 집에 살며 연못을 설치하고 정원을 만들며 가꾸는데 열정을 보인다. 가족들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모네는 충격으로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지만, 자신이 꾸민 정원에 영감을 얻어 사망할 때까지 정원과 연못을 바탕으로 수련 연작을 그리게 된다. 이후에는 백내장에 걸려 거의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저 감각에 끌려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흔히 모네가 큰 캔버스 모든 공간을 연못으로 표현해 자연에 몸을 담그는 듯한 감각을 발휘했다고 평한다. 모네는 자신의 작품이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명상의 피난처’로 사용되길 바랐고, 작품 속 형상들이 미술관을 방문한 사람들의 피로하고 지친 신경들을 진정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모네의 믿음처럼 자연은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녹지공간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비교했을 때 질병에 걸릴 확률이 낮고 불안장애나 우울증을 겪을 확률이 낮다고 한다. 녹지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한 실험에서 참여자들에게 수학 문제를 풀게 함으로서 스트레스를 촉진시킨 후, 이들을 세 집단으로 나눴다. 한 집단은 잔디와 나무가 보이는 창가에 자리 배정을 받았고 다른 집단에는 자연을 담은 화면이 나오는 TV를 보았다. 마지막 세 번째 집단은 아무것도 없는 하얀색 벽면을 보았다. 그 결과 창가에 앉아 나무와 잔디를 본 집단의 스트레스 수준이 다른 두 집단과 비교했을 때 가장 많이 감소했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스트레스를 유발시키고는 한 집단은 실내에서 좋아하는 책을 30분간 읽게 하고 다른 집단은 야외로 나가 30분간 정원을 가꾸게 했다. 그 결과, 정원을 가꾼 참여자들의 스트레스 수준은 독서를 한 사람들 보다 훨씬 더 많이 감소했고 기분이 더욱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자연은 심신이 지쳐있는 우리에게 즐거운 긍정적인 기분변화를 가져다 주는 치유 수단이 될 수 있다.
모네의 인생을 알고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겪었을 절망에 마음이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는 절망과 슬픔을 뛰어넘는 무엇이 있다. 어두워지는 눈으로 여린 빛의 감각을 느끼면서 그려낸 그의 작품에는 자연의 신비함이 담겨 있다.
모네는 현대사회에 힘들고 지쳐서 치유받을 우리들의 상심한 마음들을 그때 이미 예상했던 것이 아닐까. 이것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치유적인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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