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사회주의 정부 세웠지만… 러 제국군 장군 중심 반혁명군과 넉달 뒤 3년간의 권력 쟁탈전 시작
20대 청년들 붉은 군대 지휘관으로… 어린 군대, 두 수도 줄곧 지켜내며 주코프·스탈린 등 많은 영웅 키워
우랄 전선에 조선·중국인 상당수… "일본이 시베리아 침공했다" 소식에 수개 연대 형성 붉은 군대 가담
1914년 7월 말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2세는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러시아군을 총동원한다는 칙령에 서명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제국의 운명을 좌우할 전쟁의 개시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고뇌에 짓눌려 머뭇대는 최고 통치자에게 내무대신이 이렇게 말했다. “나라 전체가 무기를 들고 전쟁을 하는 길 이외에는 내전의 위험을 진압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전쟁이야말로 국내의 적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황제는 용기를 내어 총동원령에 서명을 했다.
내무대신이 말한 내전의 위험은 과장이 아니었다. 7월7일 러시아 제국 수도 성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프랑스의 푸앙카레 대통령은 준(準)전시 상태에 빠진 도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노동자 10만명의 파업이 진행 중이었고 거리에 놓인 바리케이드 양 편에서 노동자와 경찰 부대가 대치하며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내부 위기에서 허우적대던 러시아 제국 통치자들은 위기 타개책으로 대외 전쟁에 뛰어드는 도박에 나선 셈이다. 도박은 들어맞는 듯했다. 총동원령이 내려지자 나라를 위해 싸우자는 애국주의 열풍이 몰아쳤고 어제만해도 정부에 돌을 던지던 시민이 오늘은 지원병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다른 유럽 열강에 견줘 사회 통합과 산업 능력이 뒤떨어진 러시아는 동원된 병사들의 군화 뒤축이 닳기도 전에 연거푸 패배를 당하기 시작했다. 숱한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고 민간인의 삶이 나날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해를 거듭할수록 심해졌고, 전쟁을 지긋지긋해하는 분위기가 전후방에 팽배했다. 이런 정세를 가장 잘 파악하고 가장 잘 이용한 정치 세력이 볼셰비키였다. 결국 볼셰비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39개월 만에 러시아에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는 것과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최고 혁명 지도자 레닌은 현실 감각을 발휘해서 1918년 3월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어 대중이 바라는 대로 전쟁에서 빠져 나왔다. 그러나 어리디 어린 볼셰비키 정권에 반감을 억누르지 못하는 정치 세력이 국내에 널려 있었고, 동맹을 깨고 단독으로 전쟁에서 빠져나간 러시아 혁명정부를 보는 영국과 프랑스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볼셰비키 정권은 어렵사리 얻은 숨돌릴 틈을 딱 넉 달 즐겼을 뿐, 1918년 여름부터 나라 안팎의 적대 세력과 본격적인 내전을 벌여야 했다. 기존의 통치 체제가 허물어진 폐허 위에서 권력을 잡아 국가 구조를 처음부터 세워 올리는 과제 하나로도 벅찬 신생 사회주의 혁명정부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 시련이었다.
참으로 다양한 정치 세력이 혁명정부를 공격했지만, 군사 면에서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제정 러시아 군대의 고위 사령관이었던 장군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반혁명 군대였다. 그리고 이 장군들 뒤에는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 14개국에 이르는 자본주의 열강이 러시아 본토에 파견한 간섭군이 있었다. 1919년은 혁명정부에 가장 가혹한 해였다. 북해와 흑해에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시베리아 동부에는 미국군과 일본군이 진주한 상태에서 황제 니콜라이2세에게 충성을 바치던 러시아 장군들이 속속 반혁명군을 결성해 혁명정부에 맹렬한 기세로 파상 공세를 퍼부었다.
혁명정부가 다스리는 영토는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성 페테르부르크)로 쪼그라들었다. 모스크바의 크레믈린에 들어선 레닌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혁명군(붉은 군대)을 키워내고 빈사 상태에 빠진 경제를 어떻게든 가동해 그 혁명군에게 무기와 군수 물자를 보급하는 과제를 지휘했다. 붉은 군대 최고 사령관이 된 ‘혁명의 야생마’ 레프 트로츠키는 그 유명한 장갑열차를 타고 전선을 누비고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에서 삐져 나오는 백위군(반혁명군)의 진격을 틀어막았다. 1920년도 쉽지 않았다. 붉은 군대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폴란드군의 공격을 물리쳐야 했고, 흑해 크림반도에서 치고 올라오는 브란겔 장군의 군대를 막아야 했다.
1918년에야 갓 출범한 붉은 군대가 막강한 국내외의 반혁명군, 간섭군과 싸워서 러시아의 두 수도, 즉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를 지켜낸 것은 놀라운 성과였다. 붉은 군대는 어린 군대였다. 지휘 능력을 갖춘 장교들이 태부족한 상황에서 20대 젊은이들이 붉은 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새파란 토마토처럼 경험이 없는 장교들이었지만, 열정과 패기를 앞세워 내전의 불 세례를 견뎌내며 경험을 쌓으면서 붉은 빛이 감도는 잘 익은 토마토가 되었다.
모스크바 부근의 빈농 출신으로 신발 직공으로 일하다가 19세에 징집되어 제정군에 들어가 기병대원으로 근무하던 한 청년이 23세에 붉은 군대 제1기병군 소속 지휘관이 되어 반혁명군과 싸웠다. 이 청년의 이름은 주코프이며,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 최고사령관이 돼 독일군을 물리치고 1945년 4월 베를린을 점령한다. 역시 농민 출신으로 수도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혁명을 맞이한 19세 소년이 1918년에 붉은 군대에 입대했고, 이듬해 연대장이 돼 시베리아에서 콜차크 장군과 싸웠다. 20세에 연대장이 된 이 사내의 이름은 추이코프이며, 이 사람은 사반세기 뒤에 제2차 세계대전의 분수령이 된 그 처절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궤멸적 패배를 안겨준다.
스탈린도 빼놓을 수 없다. 1918년 스탈린은 레닌의 지시를 받고 남부 지방의 요충지인 차리친에 파견돼 무자비한 조치를 취해 이 도시를 반혁명 군대에게서 지켜냈다. 혁명의 무대 뒤켠에서 묵묵히 일하던 스탈린은 러시아 전체에 이름을 알릴 기회를 이 차리친 방어전에서 얻었다. 이 인연을 계기로 차리친은 1925년 ‘스탈린의 도시’라는 뜻의 스탈린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 스탈린그라드를 놓고 히틀러와 스탈린이 1942년 여름부터 1943년 2월까지 사투를 벌이게 된다.
마지막까지 혁명정부에게 항거하던 브란겔 장군의 반혁명군을 태운 선박이 1921년 초엽흑해에서 빠져나가고 브란겔의 뒤를 쫓던 붉은 군대가 크림반도를 점령하면서 3년 동안의 피비린내 나는 러시아 내전은 볼셰비즘의 승리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아기를 요람에 있을 때 목 졸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던 처칠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처칠이 스무 해 뒤 아돌프 히틀러에 맞서 사회주의의 ‘수괴’ 스탈린과 동맹 관계를 맺는다.
스탈린이 이끄는 러시아의 사회주의는 1917년의 혁명가들이 꿈꾼 사회주의와는 무척이나 달랐다. 그 이상의 변질에는 내전이라는 사건이 크게 작용했다. 혁명은 살아남기 위해 내전에서 이겨야 했고 이기기 위해 많은 이상을 내버려야 했다. 그러나 어쨌든 볼셰비즘은 내전을 거치며 순수함은 잃었지만 억세고 다부진 청년이 되었다. 그 체제는 그 뒤 20세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게 된다.
러시아 혁명 직후 일어나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에 걸쳐 3년 넘게 지속된 러시아 내전은 한국인과 아무런 연관이 없지 않다. 적잖은 조선인이 러시아 내전의 역사에 발자국을 남겼다. 시베리아에서 반혁명군을 상대로 무장 투쟁을 벌이다 사로잡혀 반혁명군에게 총살당한 조선인 볼셰비키 당원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김)의 행적은 국내 학계에도 널리 소개되어 있다. 일본은 1922년까지도 연해주에 일본군을 계속 주둔시켰는데, 이에 맞서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볼셰비키당 소속 항일 파르티잔 부대가 활동을 유지했다.
러시아 제국 동쪽 변방인 시베리아와 연해주가 아니라 우랄 산맥 서쪽 지역에서도 러시아 내전기에 활약한 조선인의 자취가 눈에 띈다. 영국 신문 맨체스터 가디언의 모스크바 주재 통신원 모건 필립스 프라이스가 1918년 10월4일 영국 본사에 보낸 전신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있다. “우랄 전선에는 상당수에 달하는 중국인, 조선인 노동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공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수개 연대를 형성해서 붉은 군대에 가담했다. 이들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일본 지배 계급에 반대하는 감정이 무척 드높다.”
한편, 바르샤바에서 혁명 러시아에 관한 첩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영국군 대령은 1919년 1월19일 본국 정부 정보기관에 이런 전보를 보냈다. “우크라이나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도착하는 사람들로 인해 조선인, 중국인 부대의 수가 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부대들은 단지 도적떼이며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유일한 목적은 약탈이다.” 도적떼는 적의 비정규군을 지칭하는 표현이며, 따라서 이 영국 첩보 장교가 말한 조선인 ‘도적떼’는 붉은 군대의 게릴라 부대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러시아 내전사와 한국사는 이렇게 얽혀 있으며, 역사가의 손길과 일반인의 관심을 기다리고 있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ㆍ유럽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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