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 연기에 욕심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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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정아는 2차원의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길고 가늘었다. 한 손가락으로 밀기만 해도 넘어질 것처럼. 염정아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푼수'였다. 20년이 넘는 연기자 경력에 무게를 잡을 만도 한데 동네 아줌마처럼 편안하게 수다를 주고받았다. 염정아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처럼 보였다. 웬만한 역경과 시련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건 영화 '카트'에서 염정아가 연기한 대형마트 비정규직 노동자 한선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재벌가 안방마님 같은 이미지의 염정아가 마트 계산대의 비정규직 노동자 역할이라니. 낯설고 어색한 이 조합을 염정아의 연기가 설득한다. 그는 "제안을 받고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욕심 내서 꼭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지만 '이 역할에 어떻게 나를 생각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미스코리아 출신의 빛나는 외모가 영화에선 그저 평범한 노동자의 얼굴로 바뀐다. 171㎝의 큰 키도 이 영화에선 위풍당당한 매력이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여분의 무엇으로 보인다. “그 멀대 같은 키가 왜 그렇게 슬퍼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촬영할 땐 키가 작은 사람들 틈에서 혼자 이러고 있으니까 정말 어깨가 축 쳐지고 구부정해지더군요. ‘나 왜 이렇게 거인 같지?’ 하면서요. 영화 찍는 동안 하이힐은 구경도 못 했죠.”
한선희는 마트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잘 띄지 않는 인물이다. 정규직 전환을 눈앞에 두고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조용히 일하는 사람. 그러던 그가 회사로부터 일방적인 계약해지 통보를 받고 부당한 세상에 맞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염정아는 특별한 캐릭터가 아니라 매우 평범한 사람을 연기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저 사람이 그렇구나 하게 느끼게 만드는 인물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욕심이 더 났는지도 몰라요. 연기할 때도 과장하지 않으려고 조심했습니다.”
염정아는 스스로를 '동탄 아줌마'라고 한다. 평소 일이 없을 땐 현재 살고 있는 경기 화성시 동탄 신도시에서 또래의 동네 여성들과 스스럼 없이 지낸다. 20년 넘게 스타로 살아온 배우와 극 중 한선희라는 인물이 잘 어울려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에 그는 "영화 속 인물이 그냥 평범하게 사는 분들인 것처럼 나 역시 평소엔 평범하게 산다"고 말했다.
그는 여섯 살, 일곱 살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다. 연예인의 육아란 어떻게 다른지 묻자 “정말 똑같다”고 했다. “아침에 애들 유치원 보낼 땐 전쟁을 치러요. 억지로 밥 먹여서 보낸 다음에 마트에 가고 운동도 하죠. 애들 오는 시간에 맞춰서 학원에도 같이 가는데 제가 가서 뭘 하겠어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거죠. 아니면 또 마트에 가거나 커피를 마시고. 그러다 아이들 집에 데려와서 저녁 먹이고 씻기고 자요. 피곤해서 영화도 못 봐요. 틀어놓고선 바로 자버리죠.”
염정아는 엉뚱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다. 툭툭 내뱉는 말에 웃음이 절로 터진다. 대중이 자신을 보는 이미지가 어떤 거라고 생각하냐고 묻자 “글쎄,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라고 받아 친다. 넘치는 웃음을 어떻게 참고 있냐고 하니 “영화가 영화니만큼 촐랑대기가 그래서 많이 참고 있다”고 말한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냐고 하자 “불의 아닌 것도 웬만하면 잘 참는다”며 웃는다.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지도 않는다. ‘카트’에 출연한 뒤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아졌냐고 물으니 “내가 너무 무관심하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찾아보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했다.
염정아는 데뷔 초부터 연예인 티를 잘 내지 않는 배우였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고 학교 친구들과도 자주 어울리는 사람. 이유는 “불편하니까”였다. “처음엔 친구도 많이 안 만나고 혼자 있었던 때도 있었겠죠. 그러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술도 한두 잔씩 배우다 보니 재미있더라고요. 연예인이라고 저 혼자 다니면 누가 저랑 놀아주겠어요.”
1991년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으로 데뷔하고도 한동안 “슬렁슬렁 그냥 했던” 연기는 2003년 영화 ‘장화, 홍련’ 이후 바뀌었다. “그때부터 내가 연기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구나, 진지하게 연기를 하려고 노력하는구나 하고 느꼈죠. 연기가 너무 재미있으니까 현장 가는 것도 재미있고 캐릭터 연구하는 것도 재미있더군요.”
염정아는 2011년 드라마 ‘로열 패밀리’로 다시 한번 뛰어난 연기를 선보이며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좋은 작품과 계속 만나는 건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좋은 작품에 출연하고 있을 땐 이런 게 또 있을 것 같지만 못 만나요. ‘장화, 홍련’ 같은 영화도, ‘범죄의 재구성’ 같은 영화도 그렇고. ‘카트’도 그럴지 몰라요. 그러니 매번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죠.”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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