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프로그램의 정석 파괴 '이웃 같은 진행자' 공감해 준 청취자 많아
갑작스런 하차 이유는… 단지 조금 내려놓고 재충전하고 싶어
“방송에서는 제가 던지는 질문에 정확하게 딱 알맹이만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정말 좋거든요. 그런데 신문과 인터뷰를 하려니까 잘 모르겠네요. 핵심만 말하는 게 좋은지, 아니면 길게 이런 저런 얘기들을 털어 놓는 게 좋은지.”
6년 6개월 동안 시사 프로그램 ‘김현정의 뉴스쇼’(CBS 라디오 FM 98.1MHz)를 진행하면서 항상 인터뷰 할 사람을 찾고,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 고민했을 김현정(39) PD는 입장이 바뀐 탓인지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정치가, 학자, 문인, 예술가 등에 이어 위안부 할머니, 세월호 유가족 등 각계각층의 인물을 인터뷰한 베테랑인데 말이다.
‘김현정의 뉴스쇼’는 손석희 JTBC 보도 부문 사장이 MBC 라디오 ‘시선 집중’을 떠난 이후 가장 각광받았다. 김 PD는 솔직하고 직설적인 질문으로 정확한 답을 이끌어냈고 그 결과 올해 한국PD연합회가 주관하는 제26회 한국PD대상에서 ‘올해의 PD상’을 받았다.
그런 그가 7일 돌연 ‘김현정의 뉴스쇼’ 자리에서 물러났다. 매일 아침 7시30분이면 어김없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그의 목소리를 더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일주일 전 청취자들에게 ‘살짝’ 알렸다지만, 다가온 이별은 쓰디썼다. 마지막 방송을 마치고 라디오 부스에서 눈물을 흘린 모습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 인기 검색에 올랐을 정도로 화제가 됐다. ‘돌직구’ 질문으로 보아 이성적이고 냉철할 것 같은 그가 눈물을 펑펑 쏟는 모습에 놀란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정치인에게는 쓴소리로, 사회적 약자에겐 따뜻한 말로 위로하며 청취자들을 유쾌 상쾌 통쾌하게 했던 김 PD를 13일 서울 목동의 CBS 사옥에서 만났다.
-갑작스런 하차 소식에 아쉽고 서운해하는 이들이 많다.
“갑작스런 일은 아니다. 시사 프로를 연출 겸 진행으로 시작한 건 ‘이슈와 사람’(2005~2008)이다. 시사 프로만 햇수로 10년 가까이 됐다. 연출과 진행을 같이 하다 보니 새벽에 와서 제작진들과 모든 작업을 함께 했다. 굉장히 하드하고 ‘빡세게’ 일했다. 매우 치열한 과정이었기에 1년 전부터는 체력이 소진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겨우 만 38세인데, 방송 생활을 멀리 본다면 배터리가 0이 되어서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을 때까지 가서 쓰러지는 것보다는 지금 조금 내려놓고 재충전하고 싶었다.”
-7일 마지막 방송에서 눈물을 흘리는 동영상이 화제가 됐다.
“대중들이 이렇게까지 뜨거운 반응을 보내줄지는 정말 몰랐다. 마지막 멘트를 1분 30초 정도 했는데 그 마지막 인사말에 라디오를 끄고 펑펑 울었다는 분이 굉장히 많았다. SNS 등으로 받은 메시지 중에는 가수 이문세씨가 MBC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별밤지기’ 내려놓았을 때 이불 뒤집어쓰고 운 이후로 처음 울었다는 분도 있다.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가 그만두는데 이런 기분을 느낄지 몰랐다. 어떤 분은 내 와이프보다 목소리를 더 많이 들었던 사람이랑 헤어지는 기분이 묘하다고 했다.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내 이름이 오르내려 놀랐고 감격했다. 이 정도로 대중이 아쉬워하고 원한다면 마냥 내려놓고 충전하겠다고는 못하겠구나 생각했다.”
-김PD의 하차를 두고 말이 많다. 혹시 올해 1월 시국미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 등을 주장한 박창신 신부 인터뷰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주의’라는 중징계를 받은 것과 연관이 있는가.
-“바깥에서 보는 분들이 혹시 그 때 상처를 받았거나 외압이 있었던 게 아니냐고 하는데, 전혀 아니다. CBS는 그런 것에 영향을 받는 회사가 아니다. 오히려 ‘부당한 징계니까 소송을 하자’ 해서 소송까지 갈 정도였다. 사실 다른 방송사의 시사 프로그램은 아이템 개입이 있을 것이다. 이건 해라 하지 말아라 등으로.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게 전혀 없다. CBS의 매체 파워는 거기서 나오는 것 같다. PD가 마음껏 놀 수 있는 환경, 가장 핫한 것을 찾아서 가장 치열하게 몸을 던졌을 때 칭찬해 주는 환경 말이다. 외압 때문에 그만둘 이유가 없다. 너무 놀라운 게 어떤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김현정이 외압으로 이민을 간다더라’는 글도 있더라.”
-당시 방통심의위의 중징계 처벌에 대해 ‘정치 심의’, ‘이중 잣대’ 라는 비난 여론이 있었다. 중징계 이후에 아이템 선정이나 진행 등에서 신경 쓰이거나 위축되지는 않았나.
“조금 희한했다. 어리둥절했던 건 사실이다. 왜냐하면 박창신 신부가 미사에서 한 얘기였고, 이슈가 안 된 것을 끌어내서 이슈를 만든 게 아니었다. 그 날 그 발언은 지상파 방송사의 ‘8시 뉴스’, ‘9시 뉴스’에 보도가 된 첫 번째 헤드라인 뉴스였다. 미사에서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듣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나와야 했다. 이 분이 주말 내내 전화를 안받아서 거의 포기하고 있다가 월요일 새벽에 전화를 했는데 ‘지독하다. 새벽에 또 전화를 하느냐’면서도 노력이 가상했는지 인터뷰를 해주셨다. 방송 인터뷰는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모든 언론사가 받아 보도했다. 당사자뿐 아니라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등의 입장도 차례로 다 들었다. 나름대로 공정성을 갖춘 방송이었고 회사 안에서도 잘했다며 박수를 받았다. 라디오 프로그램으로는 17년 만에 ‘올해의 PD상’까지 받았었는데, 벌을 주시니 당황했다.”
-작년에 MBC라디오의 ‘손석희의 시선집중’의 손 앵커가 하차한 이후 청취자들에게 가장 파워 있는 시사 프로그램이 ‘김현정의 뉴스쇼’였다는 평가가 많다. 2008년부터 진행을 했는데 30대 초반의 여성 진행자, 그것도 PD라는 신분이 파격이었을 것 같다.
“그야말로 파격이었을 것이다. 기자가 아니고, 남자가 아닌 여자이고,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기에는 나이도 어리니까. 나이 든 정치인 같은 거물급들을 인터뷰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오히려 장점이자 개성이 된 거 같다.
손석희 앵커 같은 남자 진행자가 권위 있게 진행하는 게 아침 시사 프로그램의 정석이었다. 내가 그렇게 흉내를 낼 수도 없었다. 라디오는 숨기려고 해도 잘 숨겨지지 않는, 인성이 드러나는 매체다. 그래서 방송 중 인터뷰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고 하면서 본능적으로 진행했다. 그게 오히려 어필했던 거 같다. ‘내 주변의 평범한 이웃 같고 가족 같은 진행자가, 내가 지금 궁금해하는 지점들을 물어봐주는구나’하며 공감했다는 청취자들이 많다. 처음에는 염려하던 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선택이었다고 하더라.”
-그러한 걱정과 우려 속에서도 ‘김현정의 뉴스쇼’는 장기간 승승장구했다.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 있나.
“개인적으로 ‘김현정의 뉴스쇼’는 시사 프로그램의 트렌드를 바꿔놓았다고 생각한다. 쉬운 말로 설명해주고, 인터뷰는 되도록 당사자의 말을 듣는 ‘당사자주의’를 표방해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어떤 사안이 터졌을 때 그것의 날 것을 보여주고, 사람들이 평가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당사자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항상 사건의 당사자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단 3분짜리 인터뷰라도. 예전 시사 프로그램은 평론가나 시민단체 대표, 학자 등이 나와서 이슈에 대해 평하는 식이었다. 지금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유가족이나 피해 당사자가 나오고 전문가 멘트는 뒤에 붙인다. 우리가 시작한 방식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시사 프로 PD들이 우리 제작진을 만나면 막 뭐라고 했다. 일을 너무 어렵게 만들었다고. 너희 때문에 격무에 시달린다고.”
-‘김현정의 뉴스쇼’는 방송 최초로 용산 참사를 보도하는 등 많은 사건 사고를 다뤘다. 화제도 됐고 질타도 받았을 것이다.
“그 때가 가장 기억나는 인터뷰 중의 하나다. ‘뉴스쇼’ 초창기였는데, 생방송 진행 중에 용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속보를 들었다. 처음에는 뉴스 속보로 한 줄 뜨는 정도였다. ‘뉴스쇼’ PD가 무작정 용산 현장의 철거민을 뒤져서 전화를 걸었다. 마침 거기 계신 분이 전화를 받았고, 화재가 어떻게 나서 누가 병원에 실려가는지 방송할 수 있었다. 그 분의 ‘살려주세요’라는 말도 실시간으로 나갔다. 그렇게 1보를 했다. 또 한 번은 세월호 유가족인 ‘유민 아빠’ 김영호씨가 광화문에서 단식하다가 건강 문제로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있을 때였다. 김영호씨의 주치의와 전화로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김영호씨 상태가 좋지 않아 당장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빨리 가시라고 했다. 이 방송도 생중계 1보가 됐다.”
-세월호 유가족 등 많은 이들을 섭외하고 인터뷰를 했다. 기억에 남는 유가족이 있는가.
“2011년 5월 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이 머리가 아파서 밤에 의무실에 갔다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의무관이 퇴근한 상황에서 의무병으로부터 타이레놀을 처방 받은 훈련병은 결국 뇌수막염으로 사망했다. 기존처럼 했다면 교수 등 전문가가 나와서 분석하거나 기자가 보도하는 식으로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군 의료 시스템의 문제가 매번 터지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여보자고 결론 내리고 유가족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장례 치른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제정신이냐’, ‘내가 나가면 우리 아들이 살아 오느냐’며 욕을 먹었다. 그 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제2, 제3의 원통한 죽음이 나오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 나중에 마음이 열리면 연락 달라고 했다. 그렇게 매일 안부 전화를 드렸다. 일주일이 지나고서야 아버님이 인터뷰하겠다고 했고, 방송에서 정말 담담한 언어로 그 누굴 비판하지도 않고 말씀을 이어가셨다. ‘아들이 쓰러지고 나서 혼수 상태가 됐을 때 집으로 연락이 왔다. 가보니까 이미 인공 호흡기를 끼고 있었다. 손을 잡으니까 분명히 아들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아빠가 왔다고 하니까 아들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걸 봤다’며 그 얘기를 담담하게 풀어가셨다. 나는 울지 않기 위해 팔뚝에 피멍이 들 정도로 꼬집었다. 인터뷰 다음날 군에서 의료체계 전면 개편을 발표했다. 그 아버님이 다시 전화를 걸어와 끝까지 설득해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우리 방송이 추구하는 ‘당사자주의’는 이런 것이다.”
-정말 기자와 다를 바 없이 치열하게 사건 사고를 다뤘다. 라디오지만 현장을 발로 뛴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떤 현장과 인터뷰가 떠오르는가.
“연출도 하고 진행도 하기 때문에 프로그램 전체를 확실하게 알아야 하고, 인물 섭외도 직접 해야 한다. 그중 직접 섭외했던 분들이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진 이후 아무런 활동도 없었던 문재인 의원이 궁금해 섭외를 시작했다. 봄부터 계속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며 거절하셨다. 문 의원이 어떤 의원의 출판기념회에서 축사를 한다는 정보에 다짜고짜 찾아갔다. 밖으로 나오는 문 의원의 손을 턱 잡고 ‘김현정입니다. 인터뷰 한 번 하시죠’ 했다. 얼굴이 붉어지면서 놀라셨다. 하지만 흔치 않게 시사 프로 앵커가 직접 찾아온 것에 감동한 것 같았고, 결국은 라디오 시사 프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7월 재보궐 선거에서 경기 지역에 출마한 손학규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의 인터뷰도 기억난다. 수원에서 지지 연설한다는 제보만 듣고 공원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그렇게 만난 손 전 상임고문은 인터뷰를 하면 모든 매체를 다 해줘야 한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이렇게 찾아온 사람은 없지 않느냐고 설득해 현장에서 인터뷰했고, 그 내용을 역시 모든 언론이 받아 보도했다. 그러고 보니 발로 뛴 섭외도 많았다.”
-진행자로서 긴박했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 전 캐나다 국회의사당에서 총격 사건이 있었다. 밤 사이 일어난 사건이어서 새벽에 긴박하게 아이템을 교체했다. 현장의 1㎞ 반경에서 총소리를 들은 교민과 전화 연결했다. 이런 작은 차이가 모여서 프로그램의 경쟁력을 만든다. 또 한 번은 아프가니스탄 무장단체 탈레반의 대변인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인터뷰를 시도하려고 인터넷을 뒤지다가 탈레반의 공식 홈페이지를 발견해 이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온 것이다. 그래서 인터뷰가 성사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위험한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끝내 섭외가 되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텐데.
“정말 노력했는데 안 된 사람이 에드워드 조지프 스노든이다. 인터뷰를 위해 매일 이메일을 보내고 홍콩을 통해 연락도 해봤는데 잘 되지 않았다. 시간 투자를 많이 했고 꼭 인터뷰 해보고 싶은 사람이다. 또 한 명은 유명 정치인이다. 1년 정도 섭외를 했고, 언론사로서는 처음 하는 인터뷰일 것이라고 해서 기대도 컸다. 매일 전화를 하며 설득했는데, 결국 당시 경쟁 프로였던 ‘손석희의 시선 집중’에 나오더라. 그 때 아주 큰 배신감을 느꼈다.”
-PD가 진행까지 해서 이렇게 성공한 라디오 프로가 있을까 싶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예전에 가수 조규찬씨가 진행하던 ‘꿈과 음악 사이’를 연출했는데, 조규찬씨가 지각을 해서 앞 부분 멘트를 내가 한 적이 있다. 한 10분 정도. 그 때 국장님이 목소리가 시사 프로랑 잘 어울리겠다고 했고, 그 이후에 ‘이슈와 사람’ 진행자가 휴가를 가서 대타로 진행을 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온 것이다.”
-10여 년을 시사 프로에 매달렸다. 이제 다시 본업인 음악 PD로 돌아왔다.
“원래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1년 여간 근무했다. 그러나 PD가 내 꿈의 1순위였기에 다시 시험을 봐서 라디오PD가 된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라디오에서 음악을 들으며 보냈기에 라디오 PD는 내 꿈이었다. ‘뉴스쇼’ 이후 현재 ‘12시에 만납시다 김필원입니다’의 연출자로 돌아왔고, 뉴스에 기울였던 귀를 이젠 음악에 집중하며 보내고 있다.”
-다시 시사 프로의 진행자로 돌아올 것인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이렇게 아쉬워하실 줄 몰랐는데 놀랐다. 더 버텨야 했나 하는 마음에 죄송한 생각도 든다. 시사 프로를 10년 하면서 가리개를 씌운 경주마처럼 뉴스만 빠르게 쫓아가면서 달려온 느낌이다. 이제야 그 가리개를 살짝 뗀 기분이랄까. 너무 치열하게 일을 했기 때문에 옆도 좀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책도 읽고 대학원에 가서 공부도 다시 해볼 생각이다. 언제 복귀하겠다고 구체적인 일정을 말할 순 없지만, 많은 분들이 원하신다면 다시 복귀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강은영기자 kiss@hk.co.kr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연다혜 인턴기자(경희대 언론정보학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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