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부터 해마다 열어오던 한중일 정상회담이 지난해 개최되지 않았다. 일본을 시작으로 중국-한국 순으로 돌아가며 열던 회담의 당시 차례는 한국이었다. 세 나라 모두 정권이 바뀐 뒤 지도자들이 처음 얼굴을 맞대는 자리라는 기대감도 컸을 법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짐작하건대,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고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동중국해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 문제 때문에 중국이 회담을 기피한 것이 이유였다. 2012년 가을 당시 노다 일본 정권이 80년 동안 사유지이던 이 열도의 주요 섬을 국유화한 뒤 중국에서는 반일 움직임이 고조되고 있었다. 일본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을 중국에 회담을 깨트릴 계기를 만들어준 것은 지난해 4월 야스쿠니 신사 봄제례 때 총리를 지낸 아소 다로 현 부총리가 참배한 것이었다.
그러고 난 뒤 1년 반 남짓 지난 지금 갑자기 한중일 정상회담 이야기가 급물살이라도 탄 것처럼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외교장관 회담은 연내 성사 될 분위기고, 정상회담도 중의원 해산과 선거, 새 총리 임명 등 일본 정치 일정이 변수이긴 하지만 이르면 내년 초에 할 기세다.
일정도 잡지 못하고 연기하고 말았던 한중일 정상회담을 새로 열게 되는 것은 그 사이 세 나라 관계가 그만큼 좋아져서일까. 영유권이나 역사인식 문제를 둘러싸고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서로 이해를 조정해온 결과일까. 알다시피 전혀 그렇지 않다.
중국이 지난해 회담 기피 이유로 삼았던 센카쿠 열도 문제는 지금도 아무런 진척을 보지 못했다. 아니 애초 센카쿠는 무슨 진척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문제다. 독도를 놓고, 특히 정치인들이 한일간에 현실적으로 어떤 양보와 타협을 할 수 있을지(양보와 타협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믿고 싶지는 않지만)를 생각해 보면 된다. 야스쿠니를 포함한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는 더 나빠졌다. 아베는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했고, 일본 정부는 중국과 한국이 함께 공분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고노 담화 작성 경위 검증’이라는 형태로 정부 책임을 거듭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도 정상회담이 다시 열리려는 이유가 뭘까. 단순하다. 세 나라 지도자가 등을 돌리고 있는다고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절감하는데 그만한 시간이 걸린 것일 뿐이다.
물론 다시 만나도 이 문제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나는 것과 만나지 않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세 나라간에 조정하고 협력할 문제가 영유권과 역사인식 문제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통상의 협력관계는 정상이 만나지 않더라도 물론 계속돼 왔지만, 정상이 얼굴을 맞대고 현안을 논의할 때 훨씬 더 추진력이 생기고 속도를 낼 것이란 점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번 정상회담을 다시 하는 과정에서도 물론이고, 양국간 또는 다국간 위기 국면을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 늘 중요한 것은 지도자들의 외교적 수완이다. 숱한 전례가 있겠지만 최근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튼 중일 간의 ‘4개항 합의’가 좋은 사례다. 중일은 그 중 역사인식과 영유권 문제를 두고 ‘과거사를 직시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정신에 따라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곤란을 극복하는데 약간의 인식 일치를 봤다’ ‘센카쿠 열도 등 동중국해 해역에서 최근 긴장상태가 발생하고 있는데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대화와 협의를 통해 정세 악화를 막으면서 위기관리체제를 구축해 예기치 않던 사태의 발생을 회피하는데 의견 일치를 봤다’는 합의를 했다. 민감한 문제는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시간을 갖고 이야기해가자는 뜻이 담겼다.
한중일 정상회담이 치러지면 이어 주목 받을 한일 정상회담에도 양국 지도자들의 이런 수완이 중요하다. 한일협정 50주년을 지금처럼 얼어 붙은 채로 지나쳐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김범수 국제부장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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