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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감독의 꿈을 완성한 치머의 손길...음악으로 시간을 비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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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감독의 꿈을 완성한 치머의 손길...음악으로 시간을 비틀다

입력
2014.11.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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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에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을 만나고 왔다. 정확히는 만난 게 아니라 구경한 것이다. 괴물 같은 천재 감독을 직접 만난다니! 잔뜩 기대하고 기자회견장에 나갔지만 다소 실망스럽고 허탈했다. 무성의한 건 결코 아닌데 왠지 형식적이란 인상을 피할 수 없었다. 고지식하고 깐깐한 영국 신사 같은 느낌이랄까. 평소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고 주말엔 절대 일하지 않으며 약속 시간에 늦는 법이 거의 없다는 걸 보면 그때 첫인상이 실제 성격과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다. 영화도 사생활도 그는 독일 철학자 칸트가 할리우드에서 환생한 것 같은 착각을 준다.

놀런의 새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며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 교과서 위주로 수업시간에만 공부하면서도 1등을 놓치지 않던 옛 친구가 떠올랐다. 남들은 평생 한 번 만들까 말까 한 괴물 같은 영화들을 2년에 하나씩 만들고 있다니.

놀런의 영화 중 ‘인셉션’을 가장 좋아한다. ‘다크 나이트’는 처음 볼 때 소름이 너무 자주 돋아 거의 닭으로 변해버릴 뻔했지만 나중에 집에서 DVD로 다시 봤을 땐 첫 관람의 전율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에 영혼을 강탈당한 듯 얼얼한 기분이 왜 다시 오지 않은 걸까.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극장 스피커가 터질 정도로 울려대는 음악(또는 음향)을 들을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놀런의 영화를 본 다음 같은 작품을 14인치 노트북으로 다시 보면 알 수 있다. 음향이 앙상해질 때 그의 영화가 얼마나 다른 작품처럼 보이는지를. 그래서 놀런의 단짝인 한스 치머의 영화음악을 빼고 그의 영화를 상상하긴 쉽지 않다. ‘인셉션’도 치머의 음악이 없다면 훨씬 밋밋한 영화가 됐을 것이다.

‘인셉션’ OST는 치머의 경력에서 정점에 오른 작품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할리우드 대작 예고편마다 나오는 둔중한 뱃고동 소리 같은 음향, 일명 ‘브람(Braam, 의성어)' 사운드는 치머와 놀런이 ‘인셉션’에서 완성한 특허품이다. 이전에도 비슷한 음향이 쓰인 적이 있지만 원전(原典)이 될 만한 형태는 ‘인셉션’ OST의 오프닝 ‘하프 리멤버드 드림’에 처음 등장한다.

꿈에서 강제로 깨어나게 만드는 충격인 ‘킥’이 나올 때마다 터져 나오는 이 불길한 뱃고동 음악은, 영화의 테마 곡이라 할 수 있는 에디트 피아프의 ‘아니,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Non, Je Ne Regrette Rien)’의 도입부를 매우 느리게 한 뒤 두 개의 음을 타악기 소리처럼 관악기로 연주하고 그 주위를 현악기로 덧입힌 음악이다. ‘현실에서 5분은 꿈에서 1시간’이라는 상대적 시간의 흐름을 음향적으로 구현해낸 것이다. 19세기 낭만주의 음악과 20세기 미니멀리즘, 21세기의 록을 결합한 치머의 음악은 이후 등장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치며 수많은 아류를 양산했다.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파고드는 ‘인셉션’은 우울증으로 자살한 아내에 대해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는 남자 코브(리어나도 디캐프리오)에 관한 영화다. 그래서인지 피아프의 노래보다 치머의 ‘타임’이 더 기억에 남는다. 코브가 임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시퀀스를 장식하는 이 곡은 “감정적(emotional)인 음악이되 감상적(sentimental)인 음악이어선 안 된다”는 놀런과 치머의 철칙에 잘 부합한다. 무의식의 미로를 파고드는 듯한 조니 마(영국 록 밴드 스미스의 전 기타리스트)의 기타도 인상적이다.

21세기 최고의 영화음악 작곡가는 두말 할 나위 없이 한스 치머다. 그가 훗날 위대한 영화음악가로 기억된다면 놀런 감독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인셉션’ 개봉 당시 치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행히도 점점 영화음악을 잘 만들게 되는 것 같아요. 아마도 관심이 달라져서겠죠. 이젠 웅장하고 영웅적인 느낌의 곡은 못 쓰겠어요. 지금은 어떻게 하면 두서너 개 음만으로 복잡한 감정의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영화 ‘인셉션’ 엔딩 신

영화 ‘인셉션’ OST 중 ‘Time’한스 치머와 조니 마의 라이브 연주 영상

영화 ‘인셉션’의 ‘Half Remembered Dream’과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를 느리게 재생한 소리를 비교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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