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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선 중국꺼 사묵고...이제 뭘로 버틸랑가요"

입력
2014.11.1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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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이웃 동생과 감 깎기 하다 모자란 나락 얘기 나와

"괜행농으로 갈까?" 한 마디에 봇물 터진 동생의 가르침 머쓱

너무나 자연친화적인 우리집...바깥보다 추워 바람 베고 잘 판

기름보일러 호강 엄두 못 내고 지리산 종주 장비들 실내용품으로...

온종일 비와 씨름하다 라디오 켜니 FTA 대책이라는게...제정신인가

최소화 시켰다는 피해 이미 산더미

작업이 그나마 즐거운 건 새참이 있다는 거다. 감 깎기 작업을 마치고 이웃 동생이 끓여준표고버섯을 넣은 라면과 작물에 뿌려주는 한방영양제(담금주에 당귀, 계피, 감초, 마늘, 생강을 주정한 것)로 반주를 대신하니 마치 보약 먹는 기분이다.
작업이 그나마 즐거운 건 새참이 있다는 거다. 감 깎기 작업을 마치고 이웃 동생이 끓여준표고버섯을 넣은 라면과 작물에 뿌려주는 한방영양제(담금주에 당귀, 계피, 감초, 마늘, 생강을 주정한 것)로 반주를 대신하니 마치 보약 먹는 기분이다.

동네 어르신들이 저녁시간 마을회관에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다. 마을회관은 농촌생활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주민들이 추운 겨울을 날수 있는 피난처이기도 하다. 특히 할머니들이 주로 모인다.
동네 어르신들이 저녁시간 마을회관에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다. 마을회관은 농촌생활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주민들이 추운 겨울을 날수 있는 피난처이기도 하다. 특히 할머니들이 주로 모인다.
간전댁 할머니와 아내가 지리산 피아골 계곡을 찾아 단풍길을 걷고 있다. 할머니는 단풍 구경을 “정신 나간 소리”라고 하셨지만 아내와 얘기를 할 때는 젊었을 적 구경 다녔던 기억을 한참 동안 풀어 놓으셨다.
간전댁 할머니와 아내가 지리산 피아골 계곡을 찾아 단풍길을 걷고 있다. 할머니는 단풍 구경을 “정신 나간 소리”라고 하셨지만 아내와 얘기를 할 때는 젊었을 적 구경 다녔던 기억을 한참 동안 풀어 놓으셨다.

눈이 온 줄 알았다. 엊그제 아침 어스름 걷히고 드러난 앞집 지붕이 두텁게 하얀 숄을 둘렀다. 서리가 많이도 내렸다. 절기는 절기일 뿐, 아무리 입동이 지났다고 11월부터 겨울티 낼게 뭐 있나 싶었다. 그럴 거면 8월 입추 때부터 시원해지든지. 어쨌든 해도 짧아져 몸 좀 풀렸다 싶으면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나설 준비를 서둘렀다.

D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님, 오늘은 감 깎아 말려야지라. 농장으로 지금 갈께라?” 뭘 하든지 힘이 넘치는 동생이다. 남들은 감이 나뭇가지를 꺾을 정도로 붙었다는데 동생네 감 농사는 그렇지 못했다. 농약을 하지 않은 탓이다. 그래도 기운 빠지는 모습은 없다. 오히려 우리 농장 감이 잘 돼서 다행이라며 제일처럼 좋아했다. 어른한테만 배우라는 법은 없다. “그래, 지금 나도 출발하네. 농장에서 보세”

감이 담긴 포대를 동생네 집으로 싣고 가 깎기 시작했다. “형님, 한 세 시간이면 끝나겄지라? 점심으로 국밥에 소주 한 잔 하고 오후 일 하면 되겄네요.” 동생이 구했다는 감 껍질 깎는 기계는 소리를 내며 돌기 시작했지만 사방으로 껍질과 감물을 튀기며 생각만큼 능률이 오르진 않았다. 감을 잡아 돌리는 모터만 달렸다 뿐이지, 나머지는 일일이 손이 가야 했고 일머리 없는 두 사람은 기계의 ‘시다바리’노릇 이었다. 그나마 수다 떠는 재미가 노고를 덜었다. 연예인 얘기도 하고, 뒷담화로 동네 누구 흉도 보고, 최근 동생이 점 찍어 뒀다는 유치원 선생님 사진도 보면서 킥킥대고...

“헌데 형님, 형님네 이번 나락은 왜 그리 모자랐을까요?” 대화가 쭈욱 예능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다큐로 빠진다. 그것도 하필이면 왜 아픈 데를 콕 찌르는지.

“뭔 탓이 따로 있겄냐. 땅이 거짓말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한 만큼 나온 거겠지.” 아쭈, 의연한 척 형님 톤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그냥 관행농으로 할까봐?” 농담조로 이어갔다.

동생이 시끄럽게 돌아가던 기계 스위치를 껐다. “형님, 그건 아니지라. 형님이 뭐 얼매나 농사를 지었다고 그렇게 말한다요. 형님이야 사정이 좀 좋소. 꾸러미 회원들이 있응게 그렇게 농사 짓는 거 이해해주고 사묵어 주고 하는 것 아닌가요. 나 겉은 놈은 기껏 애써봤자 팔아 묵을 데가 없응게 힘든거지라.” 그냥 한 말인데 죽자고 달려 든다. “그리고 형님, 관행농 관행농 허는데, 원래 관행농이 유기농이여라. 조상들이 언제부터 약 쳤다고 약 치면 관행농이고 안치면 유기농이다요? 거 조상들 욕되게 하는 것 같아 그 관행농이란 말 맘에 안듭디다.” 배울 점이 많은 동생이긴 한데 자주 가르치려 들기도 한다.

“중국이랑 FTA도 체결됐다고 그러고, 그냥 기운 빠져서 해본 말이여. 뭘 성을 내냐.” 가라앉히려 해도 이미 봇물이 터졌다.

“이제 뭘로 버틸랑가요. 우리 동네서도 이번에 친환경 인증 포기헌 집이 엄청나데요. 최소한 사람 묵을꺼리는 제대로 지어야 하는디 참...” 옆구리 쿡 찌르면 눈물이라도 쏟을 표정이다. “사묵는 도시 사람들도 무식하긴 한가집디다. 워떻게 약 안치고 유기농으로 지은 것들이 그렇게 하나같이 깨꼬롬하고 예쁘다요. 그런 것만 찾응게 어거지로 갖다 붙이는 거 아닌가요.” 뭔가 더 얘기하고 싶은데 참는 분위기다.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는 게 노려보는 것 같았다. “왜 나한테 화를 내냐. 내가 도시 사람처럼 보여 그러냐?” 동생이 금방 눈에서 힘을 뺀다. “아 형님 그건 아니지라.”

잠시 숨을 고르나 싶더니 또 못 참겠나 보다. “전문가라는 놈이 허는 말이 중국이랑 품질로 승부허면 된다고 그럽디다. 근디 중국이 여직껏 품질로 팔아먹어서 그렇게 컸대요? 값이 싸니까들 쓰고 먹은 거 아니다요. 글먼 도시에선 중국꺼 사묵고, 농촌은 느그 농민이 지켜라? 농민은 다 자원봉사자고 애국지산 줄 아나보네이 씨부럴. 이제 대농들만 쬐금 버티다가 다 무너지게 생겼어요 형님. 대농이라고 중국헌테 이기겄소? 땅땡이 크기가 다른데?” 되도록 대꾸를 안했지만 얘기는 꽤 오래 이어졌다. 화풀이와 곶감 작업은 어둑해지도록 계속됐고, 결국 9시가 넘어서야 소주 뚜껑을 땄다.

과음을 했는지 느지막이 일어나서 보니 땅이 젖어 있었다. 안갠가 싶었는데 빗방울이 보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차, 콩! 꺾어 말리느라 줄 세워 놓은 콩을 덮지 않고 방치했다. 부리나케 농장으로 가서 포장을 덮는데 날이 맑아진다. 분명히 비는 오후에 온다고 들었는데 새벽에 한 줄기 지나갔나 보다.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 다시 포장을 벗겼다. ‘131’로 전화해서 일기예보를 들으니 오전에 잠깐 오고 오후엔 그친단다. 마음 놓고 농막에 들어와 장화로 갈아 신고 커피잔에 입을 대는데 또 빗줄기가 후두둑거린다. 여기 저기 모아놓은 콩더미를 다시 덮느라 난리를 쳤다. 이후에도 포장을 열었다 덮었다 하는 비설거지 놀이를 세 번이나 더 해야 했다. 도대체 믿을 구석이 없다.

오전에 토란 캐고 오후에 양파 심으면 오늘 땡이다 싶었는데 왔다리 갔다리 하다 보니 화도 나고 몸도 지쳐버렸다. 열은 받았는데도 비에 젖은 몸은 으스스 떨렸다. 옷도 말리고 몸도 녹일 겸 농막 난로에 불을 땠다. 잔가지 몇 개 넣고 토막 나무를 넣으니 잘도 탄다. 그래 봤자 잠깐이다. 난로는 나무 먹는 귀신마냥 흔적도 별로 남기지 않고 홀라당 없애 버린다. 여기 저기 구멍 숭숭 뚫린 농막은 금새 외부 온도와 같아졌다. 지난 겨울 우리집도 그랬다.

동네에서 잘 살던 집이라고 했다. 지붕엔 기와가 올라가 있었고 벽엔 흙도 발라져 있었다. 방은 작았지만 목욕탕은 널찍했다. 살아보니 '자연친화적인 집'이었다. 밖이 더우면 집안도 덥고 바깥이 추우면 방은 조금 더 추웠다. 바람이 심한 날이면 집안에도 바람이 휭휭 불었다. 자려고 몸을 누이면 옷장과 벽 사이에서 바람이 흘러 나오는 신선한 바람이 콧잔등을 넘나들었다.

겨울에 지리산 종주를 해보려고 장만해 두었던 장비들은 그 덕에 실내용품이 됐다. 내복을 챙겨 입고 다운 파카를 꺼내 입었다. 캠핑용 방한 덧신을 신고 가끔은 발 밑에 휴대용 가스히터를 놓기도 했다. 불 좀 때고 살지 그러냐고? 시골집 난방이란 게 그렇다. 도시가 아니니 도시가스가 들어올 리 없고, 기름보일러를 쓰는데 아끼고 춥게 살아도 한겨울에 네 드럼은 들어간다(1드럼은 약 200리터다). 100만원 돈이다. 보일러 컨트롤러의 온도는 내내 17℃를 표시하고 있었다. 아낄 마음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희망온도를 높여봤자 기온은 희망만큼 올라가지 않는다.

주변의 집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간전댁할머니 집도 방에 들어가보면 싸늘한 냉기가 차지하고 있다. 옛날식 여닫이 문에 창호지 붙인 게 방풍장치의 전부다. 화목(火木) 보일러를 설치한 집도 있지만 기운 딸리는 노인들은 기름 보일러를 쓸 수 밖에 없다. 할머니는 1년 내내 두 드럼을 쓰신다고 했다. 50만원으로 한 겨울을 지내는 거다. 그것도 할머니에겐 큰 부담이다.

그나마 우리처럼 온도를 맞춰 놓지도 못하고 ‘외출(보일러가 얼지 않을 정도로 가끔 작동되는 모드)’에 놓고 쓰신다. 온수는 언감생심이다. 햇볕 좋은 날이면 집 마당에 커다란 고무대야 한 가득 물을 받은 뒤 고무줄을 이용해 비닐을 덮어 놓는다. 해 질 무렵 그렇게 미지근해진 물로 머리를 감으신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은 생각도 안하고 사신다.

겨울이면 마을회관에 어르신들이 북적거린다. 매일 점심을 같이 해서 드시고 가능하면 저녁까지 잡수신다. 공동체생활의 흔적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집이 추우니 난방비도 아낄 겸 한 곳으로 모이는 이유가 크다. 여느 동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은 가능한 한 늦게까지 회관에 계시고 싶어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실 때면 지팡이도 땅에 끌리는 듯 힘겨워 보인다.

옷도 대강 마르고 난로 불도 약해지는 것 같아 토란밭으로 나서려는데 또 비가 온다. 콩 포장을 마지막에 걷었는지 덮었는지 헷갈려 뛰어나가 보니 얌전히 잘 덮여있다. 나한테 내가 속은 건데 또 열이 오른다. 음악이나 듣자 하고 라디오를 켜니 지방 자체방송으로 FTA를 다루는 대담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농산물 가운데 중국에 경쟁력이 있는 품목은 뭐가 있을까요.”

“없죠.”

사회자도 당황한 듯 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농업이 살길은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가공품을 노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김치 같은 거죠. 한류 영향으로 중국 부유층들이 한국 김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쪽으로 정책을 집중한다면...”

열이 더 오르며 누군지 이름 좀 알고 싶었다. 제 정신인가. 중국 농산물 들어오기 시작하면 곡물, 채소를 가리지 않고 수입할 텐데, 값싼 중국 배추 들여와서 김치 만들어 되팔면 중국 멍청한 부자들이 그걸 다 사먹을 거란 말인가? 아니면 우리나라 농업을 아이돌 키우는 대형 연예기획사에 맡겨 한류란 이름으로 수출이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FTA가 체결될 때마다 “농축산업 피해를 최소화 하는데 최선을...” 어쩌구 한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최소화시켰다는 피해만도 이미 산더미가 됐다. 가랑비에 옷 젖고, 잔 매에 골병 들었는데 정신 못 차린 것 같다. 장담하건대, 아마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이런 뉴스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산업계와 관련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 하는 선에서 농산물 추가 수입을 제한하는 협상을 벌이고 있습니다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안타깝습니다.” 분명히 그럴 거다.

오늘은 아내와 단풍 다 지기 전에 피아골 언저리라도 다녀오자고 했다. 간전댁할머니와 구(舊) 이장님을 모시고 가기로 했다. 할머니를 모시러 가니 대뜸 마른 누룽지와 양파 모종을 차에 실으셨다. 농장에 가자는 말로 들으셨나 보다. 구 이장님과 아내를 태우고 피아골로 방향을 잡으니 할머니가 어리둥절해 하신다. “농장 안가고 어디로 가는겨?” 시치미 뚝 뗀 아내가 답한다. “단풍놀이! 할머니 단풍놀이 안 가신지 몇 십년 됐다며. 이럴 때 한 번 가는 거지. 이쁜 산도 보고 피아골 가서 닭백숙이라도 먹게~” 좀처럼 언성 높일 줄 모르시는 할머니가 호통을 치신다. “정신 나간 소리 하구 있어! 일 냉겨 놓고 무슨 단풍놀이여! 나 안 가. 나 어지러워. 얼른 내려줘. 버스 타고 돌아갈텡게!”

말씀을 끊고 속도를 높였다. “할머니. 정신 나간 세상 살라믄 가끔은 같이 정신 나가야 되요. 그래야 덜 어지럽대요.”

前 한국일보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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