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원의 고뇌ㆍ낭만이 단골 소재
제임스 본드 등 유명 캐릭터 배출
적과 동지 명확한 구분도 특징
마피아ㆍ마약 거래 다루거나
알카에다ㆍ이슬람 지도자 소재 인기
주요 전환기 다룬 출판 이어져
1989년 11월7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40년 가량 세계를 동서로 나눴던 냉전도 녹아 내렸다. 냉전체제의 해체는 문화계에 영향을 미쳤다. 냉전을 소재로 독자를 유혹했던 첩보소설은 특히 큰 변화 앞에 놓였다. 소설의 배경이 달라졌고 등장인물의 업무도 크게 바뀌었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베를린장벽 붕괴 25주년을 맞아 최근 냉전의 종언이 첩보소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했다.
중국과 테러의 부상
냉전은 많은 스타 작가를 낳았고 유명 캐릭터도 배출했다. 영국 작가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를 위시로 존 르 카레의 조지 스마일리, 렌 데이튼의 해리 팔머 등이 서구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냉전 시절 첩보소설의 단골 소재는 이중간첩이었다. 프레데릭 포사이스의 ‘제4의 규약’이 대표작이다. 세뇌 효과가 주는 환상도 자주 활용됐다. 첩보원들이 겪는 도덕적인 고민과 정신적 상처도 주요 구성요소였다. 제임스 본드가 대표적이다. ‘악의 제국’에 맞서 싸운다는 명분 속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는 모습이 종종 묘사됐다. 첩보원 생활의 낭만적인 면모도 자주 부각됐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저녁을 함께 하거나, 독자들이 닿을 수 없는 머나먼 곳을 방문해 ‘철의 장막’ 뒤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첩보원의 특권처럼 그려졌다. 제임스 본드가 주인공인 ‘007’시리즈가 스크린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이유 중 하나다.
뚜렷한 적의 존재는 냉전을 배경으로 한 첩보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다. 냉전시대가 저물며 “첩보소설은 완벽한 적을 잃게 됐다”(첩보소설 작가 조셉 커논). 첩보원들이 배신과 음모를 넘어 얽히고설킨 난제를 풀어낼 때에도 적만은 단순하고 명확했다. 초강대국 미국에 맞섰던 옛 소련이 무너지면서 작가들은 더 이상 적과 동지가 명확한 이분법적 접근에 기댈 수 없게 됐다. 거대 국가 러시아가 존재하고 있으나 이젠 덜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주요 소재로 떠올랐으나 냉전체제 붕괴 뒤 등장한 여러 갈등 중의 하나일 뿐이다. 미국의 첩보소설 작가 올렌 스테인하우어는 “테러가 소설 속 갈등의 우선적인 재료가 됐으나 냉전 시기에도 존재했던 소재”라고 말했다. 중동 국가들과 종교적 극단주의의 복잡한 관계도 소설의 주요 재료가 됐다. 최근 국제적 문제가 된 미국의 전자감청과 내부 고발자도 새로운 소재로 각광 받고 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부각시키기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냉전 배경 첩보소설 출간 여전
유명 작가들은 바뀐 시대에 금세 적응했다. 르 카레는 러시아 마피아와 국제 마약 거래, 돈세탁 등의 소재로 갈아탔다. 케냐 빈민을 대상으로 비밀리에 의약 실험을 하는 다국적 제약사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비판한 ‘콘스탄트 가드너’로 건재를 과시했다. 냉전이 남긴 어두운 유산을 그려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대테러 전선에서 활약중인 첩보원의 고뇌를 담은 ‘모스트 원티드 맨’ 등 화제작을 내놓았다. 르 카레는 베를린 장벽 붕괴 뒤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언제나 냉전이 만든 도덕적 중압감에 신음하다 이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사람들을 다뤄야만 했다”며 “새로운 카드가 주어져 무척이나 기쁘다”고 밝혔다.
포사이스도 연착륙에 성공했다. 그는 걸프전쟁을 다룬 소설 ‘전쟁의 주먹’으로 냉전에서 빠져 나왔다.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와 싸우는 미국과 영국 첩보원들의 모습을 그린 ‘아프간’과, 과격 이슬람교도들에게 미국과 영국의 지도자 암살을 촉구하는 종교지도자의 음모를 다룬 ‘살해 명단’으로 인기를 이어갔다.
냉전은 과거가 됐으나 몇몇 작가들에게는 아직 좋은 소재다. 신선하지는 않으나 현재를 다루는 소설보다 확실성을 지녔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냉전이 태동하기 직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1930~40년대 소련과 서구 정보기관이 나치에 맞서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앨런 퍼스트의 첩보소설이 대표적이다. 커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1945년을 배경으로 한 소설 ‘낭비하는 첩보원’과 ‘선한 독일인’을 잇달아 선보였다. 커논은 “(45년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시작 된 주요 전환기”라고 평가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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