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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국가ㆍ민주주의 사이에서...길 잃은 일본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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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국가ㆍ민주주의 사이에서...길 잃은 일본의 현주소

입력
2014.11.1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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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마에 준이치 지음?심희찬 옮김

문학과지성사 발행ㆍ327쪽ㆍ1만6,000원

우리라는 말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득 얼굴이 굳는 사람이 있다. 전자의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는 상당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우리이기 때문에 시청 광장에 모여 승리의 감격에 도취하고, 또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성소수자에 대해 격렬한 혐오감을 표출한다. 그에 비해 후자의 사람이 더 많아진 ‘우리’는 생산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함께하지 않는 분노, 함께하지 않는 환희는 폭발력이 적어 무엇의 원동력도 될 수 없다.

효용을 따졌을 때 전자와 후자 중 어느 쪽에 설지는 이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무엇이 진실에 가까운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분노 중 ‘내 것’은 몇 퍼센트나 될까.

일본 역사?종교학자 이소마에 준이치의 ‘상실과 노스탤지어’는 국민국가와 민주주의 국가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현 일본의 문제점을 파고든다. 일본 학계를 비판하는 외양을 취하고 있지만, 공동체라는 환상을 깨부순다는 점에서 한민족으로, 좌파로, 우파로, 남성으로, 여성으로, 의심 없이 뭉쳐 분노와 환희를 발산하기 좋아하는 우리에게 무수한 시사점을 던지는 책이다.

저자가 문제 삼는 것은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으로 대표되는 문화다원주의다. 가라타니는 이 책에서 일본이라는 공동체가 동질적 의식을 강요하는 밀봉된 집단임을 비판하며 외부와의 교통을 통해 차이를 인정하는 데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소마에는 가라타니가 꺼낸 ‘공동체’와 ‘외부’라는 개념에서 이미 진실이 퇴색하기 시작한다고 지적한다. 공동체가 상정하는 ‘같은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 ‘이윽고 슬픈 외국어’의 한 구절을 인용해 부연한다.

“‘슬픈’이라고 해도 그것이 외국어로 말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거나, 아니면 외국어를 잘 말할 수 없어서 슬프다는 건 아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무슨 연유인지 내게 자명성을 지니지 않은 언어에 이렇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 자체가 일종의 슬픔과 비슷한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리고 가끔 일본에 돌아오면, 이번에는 ‘지금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기는 이런 것들이 정말 우리에게 자명한 것일까’라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슬퍼진다.”

하루키의 슬픔은 장구한 개인사를 통해 축적된 단단한 정체성이 고작 환경의 변화로 공중분해되는 슬픔이다. 저자는 하루키의 슬픔을 ‘여백’을 발견한 슬픔이라 부르며, 일본인을 비롯해 현 국민국가 제도의 한계를 목격한 모든 이에게 여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여백은 가라타니가 말한 공동체의 여백이 아닌, 개인의 여백이라는 점에서 공동체를 붕괴시키고 ‘우리’를 부인한다.

날조된 ‘우리’를 벗고 진실하지만 힘 없는‘개인’으로 돌아온 자에게는 어떤 보상이 있을까. 진실 한 조각만 손에 쥔 채 벌거벗고 집단 밖으로 내쫓기는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해 저자는 ‘공명’이라는 두렵고도 매혹적인 단어를 사용한다. 가공된 동질성으로 뭉쳐 가공의 분노를 발휘하는 대신, 온전한 개인으로 서서 서로의 고독이 공명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서예가 이시카와 규요의 말은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불러 일으킨다. “세계는 폐허, 관계는 거절, 개인은 절망에서 출발하는 이외에는 없는 바, 여기에야말로 무한의 희망이 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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