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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까지 사로잡은 一人天下…언론 인권은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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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까지 사로잡은 一人天下…언론 인권은 후퇴

입력
2014.11.13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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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공신 집안 프리미엄으로… 부친 시중쉰 전 부총리 대장정 때 마오·홍군 옌안 정착에 크게 기여

반부패·친서민 인민 마음을 사로잡다… 만두집 방문 등 서민과 격의 없는 대화

4중전회서 의법치국 전면 추진… 권력 공고화 법적 근거·제도 마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1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 환영행사 중 군인들의 사열을 받고 있다. 베이징=AP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1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 환영행사 중 군인들의 사열을 받고 있다. 베이징=AP연합뉴스

15일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된 지 만 2년이다. 그가 최고 지도자가 된 뒤 중국은 사회 전 분야가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지난 2년을 되짚어 앞으로 8년의 중국을 내다보는 기획 기사를 두 차례 연재한다.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겠다.”

2012년 11월15일 중국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18기1중전회)에서 총서기로 선출된 시진핑은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날 세계 언론이 더 주목한 건 그가 인민해방군을 지휘하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까지 거머쥐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향후 10년간 중국을 다스릴 새 지도자가 전임자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을 쥘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은 2002년 11월 총서기로 선출됐음에도 1년 10개월이 지나서야 중앙군사위원회를 접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 주석은 당권과 군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이어 그는 지난해 3월 주석에 올라 당ㆍ정ㆍ군을 모두 접수했다.

시 주석의 권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주요 경제정책 등을 지휘하는 중앙재경영도소조 조장직도 맡고 있다. 1998년부터 줄곧 총리가 맡아온 자리였다. 시 주석은 이에 앞서 중앙전면심화개혁영도소조(지난해 12월) 중앙인터넷안전정보화영도소조(2월) 중앙군사위국방군대개혁심화영도소조(3월) 조장도 맡았다. 지난 1월에는 새로 생긴 중앙국가안전위원회 주석도 꿰찼다.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에 비견될 정도의 강력한 1인 지도체제 구축으로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7명) 집단지도체제는 유명무실이 됐다.

그는 원로들의 입김까지 차단하고 있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은 후진타오에게 공식 권한을 물려준 후에도 상왕으로 불리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후진타오 시절 관영매체 보도에서 늘 후 주석 다음에 호명됐던 그는 이제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원 등 현직 인사 뒤에 소개되고 있다.

시 주석이 2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이처럼 강력한 권력을 쥐게 된 배경엔 그가 개국 공신 집안 출신이란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시 주석의 아버지인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는 국민당에 쫓겨 대장정을 했던 마오와 홍군이 옌안(延安)에 정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시중쉰은 산간(陝甘ㆍ산시성과 간쑤성)변방소비에트정부 주석이었다. 이후 수립된 공산당 정권에 시 주석 집안은 일정한 지분을 가진 셈이다.

특히 시 주석은 ‘반부패’ ‘친서민’을 통해 인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시 주석은 2012년 말 호화 연회 등을 금지하는 ‘8항 규정’을 하달한 데 이어 지난해 1월엔 “호랑이(고위 부패 관료)와 파리(하급관리)를 한꺼번에 때려 잡아야 한다”며 반부패 투쟁의 포문을 열었다. 이어 중앙기율검사위원회와 암행어사격인 중앙순시조를 동원해 전방위 사정을 펼치고 있다. 지금까지 낙마한 ‘호랑이’(장차관급 이상)만 저우융캉(周永康)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를 비롯 55명이나 된다. 지난해 부패와 관련해 처분 받은 당원 간부만 18만여명이다.

이와 함께 시 주석은 이전 지도자들과는 달리 서민들과 소통하는 모습으로 인민들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있다. 지난해 12월 시 주석은 베이징의 한 만두집을 예고 없이 방문했다. 다른 사람들 뒤에 줄을 서 기다려 직접 주문을 한 뒤 만두가 든 쟁반을 들고 탁자로 가 서민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은 감동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당시 지불한 금액은 21위안(3,800원)이었다. 지난 2월에도 베이징의 전통 주택가 골목길인 ‘난뤄구샹’을 찾아 시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스모그가 일주일 가까이 이어지던 때다. 고위층은 중난하이(中南海ㆍ베이징 도심의 고위 간부 집단 거주지)에서 공기청정기만 돌리고 있을 것이란 비판이 쏙 들어갔다.

공산당 지도부는 지난달 열린 18기4중전회에서 ‘의법치국’(依法治國)을 전면 추진하기로 했다. 당이 이끄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 법치 국가 건설이란 총목표가 제시됐다. 당의 최고 권력자는 시 주석이다. 시 주석 권력 공고화의 법적 근거와 제도화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시 주석의 권력 강화는 사회 통제의 강화를 수반하고 있다.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는 개방되고 민주화에 대한 열의는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에서 이 같은 과거회귀를 인민들이 고분고분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사실상 정권에 대한 반기를 든 것이나 마찬가지인 ‘헌정(憲政)’ 주장을 담은 광둥성의 시사주간지 남방주말(南方週末)의 지난해 신년호는 당국의 검열로 제목과 내용이 바뀌었고 기자들의 저항을 불렀다. 공산당과 정부를 비판해 온 샤예량(夏業良) 베이징대 교수는 지난해 해직됐다. 공직자 재산 공개 운동을 벌여온 인권 변호사 쉬즈융(許志永)도 지난 4월 공공질서 교란죄로 구속됐다. 위그르족 학자 일함 토티는 지난 9월 국가분열죄로 종신형과 함께 재산을 몰수당했다.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는 한족의 소수민족 차별과 탄압에 반대하는 분리 독립 세력들의 저항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월 우루무치에서 자살 폭탄 테러로 31명이 숨진 데 이어 7월 사처현에서는 한족과 위구르족의 충돌로 무려 96명이 사망했다. 3월에는 신장을 넘어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역에서도 무차별 칼부림 테러가 발생해 17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앞서 위구르인들은 베이징 톈안먼(天安門)광장의 마오 초상화 앞에서 차량 자폭 테러를 벌이기도 했다.

시 주석의 권력 장악이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란 지적도 나온다. 관건은 군부다. 시 주석이 지난달 31일 중국 푸젠(福建)성 구톈(古田)에서 전군 지휘관 회의를 소집해 당에 대한 군의 절대 충성을 강조한 데 이어 지난 6일 인민해방군 심계서(審計署ㆍ회계감사부서)를 총후근부(總後勤部ㆍ군수총괄기관)에서 중앙군사위원회로 귀속시켜 편제하도록 한 것은 군부 내 반발이 만만치 않다는 방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금은 물밑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 투쟁이 언젠가 표면화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한 외교 소식통은 “장쩌민 전 주석의 영향력이 아직 죽지 않았다”며 “궁지에 몰린 저우 전 서기 세력도 시 주석이 틈을 보이면 반격에 나설 수도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박일근특파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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