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나의 사랑이’로 입을 여는 사람과 ‘나의 사랑은’으로 운을 떼는 이는 어떻게 다른가. 나의 사랑이 시작되고 나의 사랑이 꽃을 피우고 나의 사랑이 끝나는 반면, 나의 사랑은 뜨겁고 나의 사랑은 파괴적이며 나의 사랑은 상대를 뒤흔들어 무슨 반응이든 받아 내고야 만다. ‘나는’하며 나서는 이는 세계의 한가운데 터를 잡고 앉아 만물을 척량하지만, ‘내가’라며 자리를 지키는 자는 만물의 일부가 되어 함께 흘러간다.
정끝별(50) 시인의 새 시집 ‘은는이가’(문학동네)가 출간됐다. 1988년 등단해 올해로 26년째 시를 쓰는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고약한 계집애 같은 천진함은 여전한데, 나이듦과 죽음의 그늘이 아귀가 틀어진 채 들씌워진 모습이 이질적이다.
“추풍낙엽 되어 휩쓸려도 봤고 / 엎친 데 덮친 물도 먹을 만큼 먹었고 / 악삼재에 아홉수도 고스란히 받아냈으니 // 백전에 노장은 아니더라도 / 산전이나 수전 하나쯤은 건넜으리 (…) 에라이, 닥쳐라 닭들 / 나도 이제 늙어볼 테다! // 쉰이라는 데 봄은 또 오고 / 진 데 겹쳐서 진다, 모란”(‘모란 진다’ 일부)
서른이 여름과 비슷해 이십 대를 향한 미련과 사십 대를 향한 우려가 전부라면, 쉰은 가을과 닮아서 지나간 봄을 정리하고 다가올 겨울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힘을 갖는다. 쉰에 이른 시인의 미덕은 봄을 미화하고 겨울 앞에 쓸쓸해지는 신파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소나무는 / 수수만년의 반만년을 살아내느라 / 긴 폭설과 긴 뙤약볕을 받아내느라 / 뼈다귀 같은 흰 몸통을 뒤틀고 있었다 (…) 해발 삼천 미터 산비탈 사막에서 / 삼칠일 남짓한 눈석임물에 한 해의 뿌리를 적시는 / 죽었다고도 살았다고도 할 수 없는 /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소나무를 하마터면 / 희망의 등골이라 부를 뻔했다.” (‘죽음의 속도’ 일부)
969세까지 살았다는 성경 속 인물 므두셀라의 이름에서 유래한 므두셀라 증후군은 과거의 일 중 좋았던 기억들만 남겨 청춘을 ‘좋았던 시절’로 치부해버리는 성향을 뜻한다. 폭설과 뙤약볕을 견디며 수 천 년을 버텨온 소나무에게 경배하려던 시인은 황급히 손을 거둔다. 뼈다귀처럼 뒤틀린 몸통이 경배의 사유가 된다면 물색 없이 뻗은 어린 나무는 경멸을 받아야 하리라. 청춘과 죽음에, 참 흔하게도 씌워지는 경배와 경멸과 질투와 공포의 이미지를 시인은 쾌도난마와 같은 시어로 잘라낸다.
청춘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우리는 그렇다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할까. 시인이 은근하게 제안하는 것은 ‘는’에서 ‘가’로 옮겨가는 삶이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 나는 사랑‘은’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이(가)’로 세상과 놀고 / 보면서 안 보는 나는‘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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