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라는 곳이 우리나라의 인권정책을 후퇴시켜 놓고는 참 뻔뻔스럽다.”
11일 한 인권단체 관계자는 전날 밤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가 인권위의 등급심사를 내년으로 연기한다고 통보했다는 보도가 나온 데 대해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를 비롯한 인권 전문가들은 ICC가 올해 3월에 이어 재차 등급심사를 연기한 것은 국제사회 관례를 볼 때 사실상 등급을 하락시키겠다는 신호라고 탄식했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도 인권위의 안이한 반응을 보면 인권단체들이 통탄할 만하다. 인권위는 등급심사 재보류에 대해 “ICC가 우리나라 법과 제도, 상황에 대해 얼마나 깊게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도리어 ICC를 탓하고 있다. 인권위는 “ICC가 인권위 설립 장려를 위해 초기에는 심사를 유연하게 하다가 13년이 지나니 엄격하게 바꾼 측면이 있다”고도 했다. 마치 인권위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ICC가 일부러 흠집내기를 하고 있다는 태도다.
ICC가 등급심사를 보류하면서 인권위에 관해 지적한 내용은 인권위원 구성의 다양성 부족과 인권위의 독립성 미흡 두 가지로 압축된다. 이에 대한 인권위의 대응을 하나씩 살펴보면 인권위의 태도가 얼마나 비상식적인지 명징해진다.
우선 인권위원 10명 중 7명이 법조인 출신인 만큼 인권위원 구성을 다양화하라는 권고에 현병철 위원장은 “변호사 자격증이 있다고 다 법조인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ICC의 등급심사 기준인 파리원칙은 노동자,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등을 다양한 이해관계자로 꼽고 있다. 그런데도 “의사 같은 다른 직종을 보충할 필요는 있지만 우리 입장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게 급하다”고 강변하는 현 위원장은 본질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셈이다.
다음은 독립성. 인권위는 ICC 권고 이후 공청회 등을 거쳐 인권위법을 개정하고 인권위원 선출ㆍ지명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등 시늉은 냈지만 정작 핵심은 피해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인권단체들이 요구한 독립적인 인권위원 후보 추천위원회 신설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 후보 추천위 구성을 법에 명시하면 현재 대통령, 국회, 대법원이 갖고 있는 인권위원 인사권에 제약을 줄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입법ㆍ사법ㆍ행정부에서 독립해 이들을 비판ㆍ감시해야 할 인권위가 왜 힘 있는 기관의 눈치만 보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게 인권단체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최근 대통령몫으로 임명된 최이우 비상임위원에 대해 인권단체들이 “수 차례 성소수자 차별 발언을 한 부적격자”라고 비판해도 인권위가 “대통령이 임명했기 때문에 우리가 뭐라 말할 입장이 아니다”며 변명에 급급한 것도 결국은 이런 저자세에서 비롯됐다.
인권위는 2004년 ICC 가입 이래 5년마다 실시하는 ICC 평가에서 A등급의 지위를 잃은 적이 없다. 그랬던 인권위가 등급 하락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은 우리사회 인권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 없다. 실제로 현 위원장 체제의 인권위는 강제 폐쇄를 앞둔 진주의료원 환자, 과도한 공권력에 맞서 싸운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 등 약자들의 긴급구제를 외면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ICC의 지적을 생트집으로 치부하기에는 인권위의 이러한 최근 행적이 너무나 부끄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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