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한 두 명쯤은 사퇴 의사를 밝히지 않을까 했다. 회장과 행장이 전산시스템 교체 과정에 문제가 있다 없다 볼썽사납게 다투다 차례로 옷을 벗었고, 그로 인해 KB금융 임직원들이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굳이 감시와 견제라는 사외이사 본연의 책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KB금융 사외이사들이 도의적인 책임은 지는 게 상식이다 싶었다. 더구나 은행장, 학회장, 금융유관기관장 등 9명 사외이사들의 화려한 과거 이력 면면을 보면 이 정도의 소양은 갖췄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지난 달말 KB금융 이사회를 앞두고 후배 기자가 사외이사들과 그들의 거취에 대해 통화한 내용은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이사회가 뭘 잘못했는지 좀 생각해 보세요. 어려운 상황에서 잘 끌어온 것 같은데, 외부에서 보기에는 다른가 보죠?” “뭘 잘 못 했는지 지금으로선 잘 이해할 수 없네요. 거취 이야기가 이사회에서 나오면 같이 논의를 해볼 순 있겠죠. 하지만 아직까지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좀 거친 비유를 하자면,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는데 선원들이 자신들은 아무 책임도 없다고 너무도 태연하게 말하는 듯했다. 결국 그날 이사회는 자신들의 거취에 대한 아무런 논의도 없이 끝이 났다.
그날 이후 여론은 그들을 향해 사퇴를 압박하는 포화를 퍼부었다. 이사회 한 번 참석하면서 받는 거마비가 500만원이 넘는다는 비판(작년에 스무 번 이사회를 개최했는데 1인당 평균 보수가 1억1,500만원이었다)도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아침부터 밤까지, 때론 주말도 없이 뼈가 빠지게 일해도 한 달에 500만원을 못 버는 상당수 봉급쟁이들로선 울화통이 터질 일이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그에 합당한 대체 불가능한 능력을 발휘했다면야 인정해줄 법도 하지만, 그들 역시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외이사들이 그렇듯 철저한 거수기에 불과했다. 스무 번의 이사회, 36건의 안건에서 그들이 반대표를 던진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사외이사들의 맷집은 두둑했다.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새 회장을 뽑아야 하니까”라는 명분을 내세우더니, 새 회장이 내정된 뒤에는 “이사회가 경영 안정을 위해서 새 회장을 도와서 할 일이 많지 않겠느냐”고 한다. 정작 경영 안정을 지켜야 할 때는 나 몰라라 방치해 사태를 이 지경까지 키워놓더니, 이제 와서 경영 안정을 운운하는 우스운 모양새다.
외려 금융당국에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당국이 KB금융의 LIG손해보험 인수 승인을 지연하면서 사퇴를 압박하는 관치를 재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작 그들은 그런 관치에 떠밀려 임영록 전 회장 해임을 의결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이 역시 이율배반적이다. 물론 임 전 회장이 물러나도록 하는 게 옳았고 또 그 보다 좀 더 빨리 물러나게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사외이사들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자면 당국의 중징계가 부당하다며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낸 임 전 회장을 당시 이사회가 서둘러 내쫓을 법적 근거는 미약했던 게 사실이다.
KB국민은행의 사외이사들은 더 가관이다. 책임으로 따지자면 KB금융 사외이사들보다 더 크다. 사태의 발단이 된 감사의 보고서를 묵살하고 기피한 것도 모두 국민은행 사외이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어떻게든 임기까지는 버텨보자고 작정한 듯 납작 엎드려 있다.
12일 다시 KB금융 임시이사회가 열린다고 한다. 여론은 이번에도 그들의 거취 표명을 주목하고 있다. 늦었지만, 그들이 낭떠러지로 떠밀리지 않고 스스로 물러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임 전 회장이 이사회가 해임 결의할 때까지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내세운 명분이 “KB금융 명예 회복”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버티기는 KB금융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 사외이사들 역시 자신들이 물러나서 생기는 혼선보다 자리를 계속 지키면서 생기는 문제가 더 크다는 점을 모를 리 없을 거라고 본다. 더 이상 구차한 변명으로 버티지 말길 바란다. 그게 이사회 한 번 참석하는데 봉급쟁이 월급보다 많은 대접을 해준 KB금융 임직원과 고객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이영태 경제부장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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