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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야만 21세기

입력
2014.11.10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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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한 선수가 링에서 쓰러졌다. 의식불명 속에서 사투하다 숨졌다. 세계는 들끓었다. 복싱의 잔인성에 비난이 쏟아졌다. 세계 프로복싱계 수뇌부는 긴장했다. 시장이 사라질 우려가 그들을 압박했다. 성난 여론을 달래기 위해 여러 대안을 제시했다. 스파링 할 때나 사용하는 헤드기어(머리 보호 기구) 도입이 검토됐다. 글러브의 두께도 늘릴 수 있다고 했다. 머리에 가해지는 충격을 줄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들이었다.

문제가 있었다. 선수들이 호쾌하게(링 밖에선 ‘잔인하게’로 대체된다) 상대방을 쓰러트리고 KO가 많이 나와야 복싱 팬들은 환호하기 마련이다. 헤드기어 도입과 두꺼운 글러브의 사용은 팬들을 내쫓는 방침이었다. 복싱 시장을 지키려고 흥행을 막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여러 논란과 우여곡절 끝에 라운드 수가 희생양이 됐다. 세계 챔피언 타이틀전은 15라운드에서 12라운드로 줄어들게 됐다. 고 김득구 선수가 14라운드에서 쓰러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 점을 감안한 대안이었다. '흉내만 낸 개혁’이라는 비판이 따랐으나 다시 사람들은 링 주변에 몰려 환호했다. 김 선수의 죽음은 복싱의 잔인성을 새삼 도마에 올렸다.

21세기 들어 복싱은 퇴조했다. 이종격투기가 ‘케이지’(우리)라는 이름으로 변형된 링을 점령했다. 주먹으로 허리 위 앞 부분만을 공격하도록 돼 있는 복싱과 달랐다. 온 몸으로 온 몸을 공격할 수 있다. 글러브는 손 부상을 방지하는 정도로 얇다. 쓰러진 사람 위에 올라 타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공격이 주요 기술이다. 피가 튀는 경기는 함성과 갈채를 받고 있다. 복싱의 잔인성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경기 중 선수가 심하게 다치고 죽음에 이르러도 김득구 선수만큼의 논쟁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적어도 사람들은 20세기보다 폭력에 둔감해진 것인지 모른다.

폭력의 세기다. 문명의 이기가 급진하고 있고 인류의 폭력성도 강도를 더하고 있다. 이슬람 수니파 과격 무장단체인 ‘이슬람 국가’(IS)는 애먼 사람들을 참수하고 있다. 포로로 잡힌 군인들을 집단 총살하기 일쑤다. 전쟁포로의 인권 보호를 위해 제정된 제네바협정은 허울로도 존재치 않는다. 최근 멕시코에선 조직폭력배가 경찰의 협조를 받으며 시위에 참가했던 대학생들을 학살했다. 외신으로 세계의 소식들을 접하다 보면 피비린내가 곧잘 풍긴다.

지난 세기와 달리 폭력적인 장면이 일상을 파고들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주요 매개체다. 여과를 거치지 않은 여러 폭력 장면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 IS는 참수 동영상을 SNS에 ‘전시’한다. 현대판 효수다. 추상적인 단어로 전해지던 끔찍한 소식은 날 것이 되어 사람들의 동공을 맹습한다. 공포를 조장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한다. 저급한 협박이다.

반인류적 범죄를 알리려는 사람들도 종종 SNS를 활용한다. SNS엔 유혈 낭자한 현실이 종종 게시된다. 이스라엘 군인의 군홧발에 의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초주검을 당하는 모습이나, 팔레스타인 민병대에 의해 이스라엘 사람이 고통 당하는 모습이 가감 없이 전달된다. SNS로 공분을 유도해 세계의 여론을 움직이려는 일종의 선전전이다. 모자이크나 편집 없이 전해지는 폭력 장면이 둔기가 돼 머리를 때린다. 즉각적인 전달 효과는 일단 묵직하다.

현실을 고발하는 폭력 장면은 SNS에서 즐겁게 맛있는 음식을 먹는 사람의 환한 미소나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해변가의 절경과 함께 뒤섞이곤 한다. SNS 이용자들은 폭력의 야수성에 경악하다가 금세 웃음을 터트리거나 흐뭇한 표정을 짓게 된다. 폭력은 식사와 여흥과 잡담과 영화평 등과 뒤섞여 일상이 된다. 폭력에 대한 내성은 그렇게 쌓인다. 우리도 모르게 폭력이 영혼을 잠식한다.

우리는 과연 지난 세기보다 진보한 것일까. 여러 매체를 통해 쏟아지는 우울한 세계의 소식과 SNS에서 소비되는 폭력을 보자면 자신할 수 없다. 21세기도 야만의 시대다.

라제기 국제부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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