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차례 인도차이나 전쟁 관광상품화… 1998년 13곳 전쟁유적지로 지정, 식민지 향수·화해와 반성 테마
기억 속 전쟁을 체험 속 전쟁으로… 미군이 사용하던 명칭 되살리고 사격·땅굴·감옥·음식 체험 제공
관광수입 50억달러 넘어… 외국인 방문객 작년 760만명, 매년 10~20%씩 늘어나
베트남이 동남아시아의 신흥 시장으로 부상하는데 ‘관광’은 핵심 역할을 해 왔다. 수많은 여행책자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천년 고도’ ‘위대한 인류의 자연유산’ ‘마지막 왕조의 수도’ ‘프랑스 식민지의 향수’ ‘독립항전의 현장’ 등의 수식어는 베트남의 하노이, 하롱베이만, 후에, 사이공, 디엔비엔푸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되어 있다. 베트남의 이런 관광 형태는 얼핏 보면 자연, 역사, 전통문화, 유흥을 조합한 다른 동남아 국가의 패키지 관광과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한 꺼풀 벗기면 베트남 관광산업만의 차별화된 무기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전쟁’이다. 베트남 여행은 열대기후에서의 휴양, 원주민 전통과의 낭만적인 대면, 식민지 판타지의 향수뿐만 아니라 전쟁의 체험과 기억을 제공한다. 베트남은 스스로를 ‘전쟁이 아니라 나라’(A Country, Not a War)로 기억되기를 원하지만 이는 한편으로 베트남에서 그 동안 전쟁의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 아이콘이었는지를 방증하는 것이다.
근대의 파괴ㆍ폭력 경험하는 ‘다크 투어리즘’
베트남을 찾는 해외관광객 다수는 고통이 제거된 기억으로 재현되는 베트남 전쟁의 역사를 답사한다. ‘전쟁관광’에서 여행객들은 적극적으로, 비극적인 역사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전쟁관광은 근대의 파괴와 폭력을 경험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다. 전장 여행은 여행객에게 전쟁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요동치는 기억에 빠져드는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다. 무엇보다 참전의 경험을 지닌 사람이라면 고통스러웠던 과거와 화해하고 싶은 욕망이 강하다.
실제로 매년 10만명 이상이 베트남을 찾은 나라, 최근 부쩍 방문객이 급증하고 있는 국가들은 모두 1945년 이후 35년간 지속된 세 차례 인도차이나 전쟁에 직접 개입한 국가들이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년)의 당사국 프랑스는 1990년대부터 매년 10만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매년 약 22만명이 베트남을 찾았다.
베트남 역사에서 ‘항미구국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통상 베트남 전쟁이라고 불리는 2차 인도차이나 전쟁(1955~1975년)의 주역인 미국에서는 매년 약 45만명이 입국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 파병됐던 미국의 우방국들도 다수를 차지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경우 한국은 75만명, 대만 40만명, 호주 32만명, 태국 27만명, 캐나다 11만명, 필리핀 10만명 등이 베트남 땅을 밟았다.
3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남의 침공을 받은 캄보디아인은 지난해 35만명이 방문했다. 1979년 베트남을 공격한 중국은 양국 국경의 철로 통행이 재개된 이후 국적별 베트남 방문객 수에서 줄곧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중국인의 해외 관광 급증과 함께 지난해에는 191만명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전쟁상품화 90년대 후반 유적지 지정 이후
베트남이 1986년 개혁과 개방 정책을 실시하긴 했지만 바로 전쟁이 관광상품으로 등장하지는 않았다. 1990년대 중반 해외관광객이 급증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베트남 관광 개발의 중심은 수려한 자연 경관과 독특한 문화였다.
베트남 관광산업이 전쟁을 전면에 내세워 마케팅 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관광총국(VNAT)이 자국 내 13곳의 전쟁유적지를 지정하면서부터다. 현재도 이들 유적지 방문이 포함된 20여개의 패키지 관광이 관광객을 주로 유치하고 있다. 전쟁 유적에는 북부 라이쩌우성의 디엔비엔푸 유적단지, 하노이의 호아로 감옥박물관, 꽝찌성의 케산 기지, 호찌민시의 구찌터널, 꼰다오섬 감옥 등이 포함된다.
남부 베트남에서는 관광산업의 발전과 함께 민간 관광업체가 급증하면서 미국을 포함한 해외관광객만을 위한 전쟁관광 패키지가 활성화했다. 정부기관도 다국적 투자자들과 함께 ‘미국 전쟁’의 역사에서 의미가 깊은 사건들과 장소들에 대한 관광상품을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향수를 불러 일으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전쟁 당시 미군들이 즐겨 사용하던 명칭을 되살리기도 했다. 케산 기지, 미라이 학살기념관, 차이나 비치, 구찌 터널, 비무장지대 등이다.
이런 전적지나 주둔지뿐만 아니라 미군이 주둔할 당시 유명했던 호텔, 나이트클럽, 식당과 옛 미국대사관 등이 패키지의 핵심 코스가 되었다. 나아가 참전 용사들을 다시 모아 총을 쏘게 하고, 땅굴을 기어 들어가게 하고, 포로 감옥에 수감하고, 게릴라 음식을 맛보게 하는 등 기억 속의 전쟁을 여러 감각을 동원해 체험 속의 전쟁으로 재현시켜 주고 있다.
전쟁투어 베트남 관광산업 효자
전쟁관광은 확실히 베트남 관광산업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베트남이 쇄신 정책을 시작한 1986년에 베트남을 방문한 외국인은 7,000여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대부분 구소련, 동구, 중국 등 옛 사회주의권의 국민들이었다. 하지만 1988년 외국인 투자법 시행, 1993년 외국인 여행비자 발급 자유화 조치를 통해 베트남이 해외관광객 유치 정책을 본격화하고, 1994년 미국의 무역 봉쇄 해제, 1996년 대미 관계 정상화로 이어지면서 해외관광객은 눈에 띄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1988~1996년 2년마다 평균 두 배씩 외국인 방문객이 증가해 1996년에는 160만명을 기록했다.
1990년대 말 아시아 금융위기 여파로 증가세가 주춤했지만 베트남이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등 다자협력체제에 가입한 이후 외국인 방문객은 다시 늘어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외국인 방문객은 매년 10~20%씩 증가해 2010년에 505만명을 넘어섰고, 지난해에는 760만명을 기록했다. 2000년 3억 달러에 불과하던 관광산업의 수입은 2010년 50억달러를 넘어섰다. 베트남 정부는 2020년 국내총생산(GDP)의 7%에 해당하는 185억달러 관광 수입과 87만명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관광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전쟁유적지에 사용하는 공식 서사에 베트남 정부가 여전히 사회주의 혁명기의 역사 인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것이다. 해외관광객이 자주 이용하는 관광지 안내서나 가이드의 설명에서 이런 인식을 쉽게 엿볼 수 있다. 방문객 중 프랑스인이 다수인 디엔비엔푸 유적은 ‘민족 해방 완수, 승리의 역사 현장’으로 묘사된다. 하노이 군사박물관은 ‘민족의 평화와 독립, 자유를 위해 투쟁한 베트남 인민군의 웅장하고 생생한 역사’를 전시하는 곳이다.
지난 20년 간 특히 미국인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로 변모한 관광지에서도 투쟁과 혁명의 수식어는 유지되고 있다. 가령 케산 기지는 원래 미군 기지였다가 결국 북베트남 인민군에 함락된 곳인데 최근에는 인근 차이나 비치와 함께 베트남 참전 용사를 포함한 해외관광객의 주요 관광 코스가 되었다. 베트남 관광총국은 “케산 기지는 결국 함락되었고 베트남 해방기가 따꼰 고지에 자랑스럽게 휘날리고 있다”고 설명한다. 구찌 터널은 ‘남부가 미국과 꼭두각시 괴뢰정권에게서 완전히 해방된 이후 문화부가 공인한 유적’으로 표현된다.
베트남 전쟁관광에서 이런 사회주의 혹은 민족주의적인 수식어가 상업주의적 관광마케팅을 위해 활용되고 있으며 그 주요 대상이 외국인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실제로 자국 내 전쟁유적지를 찾는 베트남인은 대개 학생, 공무원 등이며 그 수도 적다. 일반 베트남 국민들은 전쟁의 역사보다 첨단 기술로 완성된 현대식 건물이나 이국적이고 다채로운 테마파크 등을 여가 활동지로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영향과 초국가적 시장경제가 보편화되고 있는 현재 베트남에서 국가의 공식 이데올로기가 관광마케팅으로 연결되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당연한 현상처럼 여겨진다. 베트남 관광정책과 관광산업은 이미 세계시장과 필요한 타협을 계속해 왔다. 미국과 수교 이후 베트남 정부가 호찌민시의 ‘전쟁범죄박물관’을 ‘전쟁기념박물관’으로 개명한 게 대표적이다.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한다’는 베트남 속담처럼 베트남은 오늘도 전쟁의 역사를 발굴, 보존, 유지하며 ‘관광 전쟁’에 나서고 있다.
최호림 글로벌발전연구원 기획경영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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