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조선의 조세제도는 조ㆍ용ㆍ조(租庸調)였다. 조(租)는 농지에 부과하는 농지세이고, 용(庸)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부역이고, 조(調)는 지방의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납(貢納)이다. 조ㆍ용ㆍ조는 균전제(均田制)와 동전의 양면이었다. 균전제는 백성들에게 농지를(田) 고르게(均) 나누어주는 토지제도였다. 균전제를 처음 실시한 나라는 고구려와 같은 계통이었던 선비(鮮卑)족이 세운 북위(北魏)였다. 북위의 토지제도는 ‘계구수전(計口授田)’이었는데, 글자 그대로 백성의 숫자(口)를 헤아려서(計) 농토를 나누어 준다(授田)는 뜻이다. 북위를 계승한 수(隋)나라와 당(唐)나라가 모두 이 제도를 계승했다. 당나라는 개국시조인 고조(高祖) 이연(李淵)은 재위 2년(619) 18세 이상의 장정들에게 100무(畝)의 토지를 나누어 주는 균전제와 조용조를 채택했다. 토지를 지급받은 백성들은 매년 2석(石)의 조(租), 20일 정도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용(庸), 그 지방의 특산물을 납부하는 조(調)를 냈다. 백성이 된 죄로 무조건 세금을 내야 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토지를 받은 대가로 조ㆍ용ㆍ조를 납부하는 쌍무적인 관계였다.
조선의 정도전도 토지제도인 과전법(科田法)과 함께 조ㆍ용ㆍ조 세제를 실시했다. 이중 농토세인 조(租)는 효종 때 1결당 4두를 걷는 영정법(永定法)으로 정착되어 그리 큰 부담은 아니었다. 문제는 조(調), 즉 공납(貢納)이었다. 지방의 특산물을 임금에게 바친다는 소박한 충성개념에서 시작된 공납은 조선 후기 들어 국가 세수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세원(稅源)이 되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가짓수도 많고 부과 시기도 일정치 않고 번잡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납세자의 빈부격차를 고려하지 않는 점이었다. 부과 단위가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가호(家戶) 단위여서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전호(佃戶ㆍ소작농)나 하루 종일 걸어도 남의 땅 밟지 않는 양반 부호나 비슷한 액수가 부과되었다. 이를 견딜 수 없었던 백성들은 도망가거나 임란 때 일본군에 대거 가담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면서 이 문제 해결은 국가 존립의 중요 현안이 되었다. 그런데 그 해결책은 간단했다. 부과단위를 가호(家戶) 단위에서 농지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바꾸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역대 조선의 개혁정치가들은 모두 이 방안은 제시했다. 조광조와 이이는 수미법(收米法)을 제안했는데, 농지 소유면적에 따라서 쌀로 통일해서 받자는 세법이었다. 그러면 농토를 많이 보유한 양반 지주들은 세 부담이 늘어나는 반면 가난한 소작농들은 면제될 수 있었다. 그간 많은 벼슬아치들과 양반사대부들은 공납의 폐단을 개선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해왔다. 그러나 막상 이를 해결하자는 수미법이 제시되자 두 손 들어 반대하는 것으로 태도를 돌변하면서 번번이 무산되었다. 임란 때 서애 류성룡은 백성들이 대거 일본군에 가담하는 등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에 처하자 작미법(作米法ㆍ질미법)이란 이름으로 수미법을 강행했다. 그러나 임란이 끝남과 동시에 류성룡이 실각한 중요한 이유도 작미법에 대한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작미법을 폐기하자 이번에는 가난한 농민들이 반발했고 광해군 즉위년(1608)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로 작미법과 같은 세법인 대동법을 경기도에 시범실시했다. 대동법의 경세가라고 불리던 잠곡 김육이 대동법 확대실시에 정치생명을 걸면서 충청도 및 전라도까지 확대되었다가 경기도에 시범실시된 지 100년만인 숙종 34년(1708)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양반사대부들의 반발을 꺾고 실시된 대동법이 가져온 변화는 많았지만 무엇보다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서 건졌다는 점이다. 현종 11년(1670ㆍ경술년)과 12년(1671ㆍ신해년)에는 경신(庚辛)대기근이라 불리는 역사상 유례없는 천재지변이 발생해 굶어 죽는 백성들이 속출했다. 이 위기를 겨우 극복한 현종 14년(1673)에 전 사간(司諫) 이무가 현종에게 “대소 사민(士民)이 서로 ‘우리가 비록 신해년(현종 12년)의 변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대동법의 은혜입니다’라고 말합니다”(승정원일기 현종 14년 11월 21일)라고 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대동법 시행에 정치생명을 건 개혁정객들은 당파 구분도 없었다. 이이, 김육, 이시방 형제 등은 서인이었고, 류성룡, 이원익 등은 남인이었다.
영유아의 보육료를 지원하는 누리예산과 무상급식 예산 등 복지예산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조세의 소득재분배 효과현황과 시사점’이란 보고서에서 조세 같은 정책수단에 의한 소득재분배 개선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2개 국가 중에서 31위라고 보고했다. 민생 구호는 현란하지만 정작 부자는 많이 내고 빈자는 적게 내는 가장 기초적인 조세정의는 남의 나라 이야기란 뜻이다. 공납 폐단의 개선을 주장하다가 막상 수미법(대동법)을 실시하자면 두 손 들어 반대하는 구호 따로 잇속 따로의 후진국형 정치행태가 계속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