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의 화가
1960년에 개봉된 영화 ‘로맨스 빠빠’의 아버지는 52세의 나이로 2남 3녀를 둔 가장이다. 보험회사를 다니지만 박봉이기에, 대학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식들의 뒷바라지가 힘겨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직장 동료들의 책상 꽃병에 국화꽃을 꽂아 주고, 막내딸이 받은 첫 연애편지를 액자에 넣고 싶어 하며, 바지가 없어 하이킹을 못가겠다는 둘째 딸에게 자신의 바지를 내밀어 주는, 따듯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아버지다.
경비원으로 일하다 감원으로 실직당한 후 만삭인 아내의 미역 값이 필요했다는 좀도둑에게 술 한 잔과 미역을 내 주던 아버지, 그 아버지도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실직자가 되지만 가족들에게 사실을 알릴 수도 없어 슬프기만 하다. 결국 실직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일하고자 뜻을 모으고 아버지의 생일날 그를 위로하는, 훈훈한 가족애를 그린 영화이다.
신상옥 감독의 이 영화는 당시 인기 배우였던 김승호가 자애롭고 낭만적인 모습의 아버지 역할을 했고 신성일이 막내로 열연했는데, 극 중 막내아들이 내 아버지의 나이쯤 된다. 그러니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0년 영화 속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가 바라보던 이상적인 아버지상이라 할 수 있겠다.
실제 나의 아버지는 광복과 6ㆍ25 전쟁에 어린 시절을 보내며 기나긴 허기와 궁핍의 시대를 살았다. 이념적 이데올로기가 강렬하게 대치됐던 때, 4ㆍ19, 5ㆍ16, 10월 유신, 5ㆍ18광주까지 경제적ㆍ정치적으로도 역경과 고난의 청춘을 보냈다. 그리고 단기고도성장을 목표로 사회적 의무감이 요구됐던 시대에, 안 되는 것도 되게 하고 죽기 아님 까무러치기라며, 이른바 헝그리 정신으로 일하며 장년을 보냈다.
그리고 겨우 삶이 안정된다 싶으니 IMF를 맞았다. 영화에서처럼 혼사를 앞 둔 자식과 막내의 대학 등록금을 내야 하는 시기에 조기 퇴직 바람이 거세게 불자, 직장에서 가장 먼저 밀려나는 세대가 나의 아버지 세대가 됐다. 컴퓨터로 일하는 것도 생소하고 자식들인 386세대에 가치관적으로도 충돌하고, 문화적 혜택은 제대로 받지 못한 세대가 지금 70대 나의 아버지 세대다.
공무원이셨던 나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사회의 엄격한 아버지로서 효와 우애를 당부하셨다. 그리고 아침마다 조간신문을 넓게 펴고 각종 성공담을 스크랩하셔서 자식들에게 보여주셨다. 위인전, 유명인의 자서전이 유행적으로 출간되던 시대였다. 그리고 종종 전쟁이나 아버지의 부재 시 위급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비장한 얼굴로 말씀을 하셨다. 사회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대였다.
나의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삶의 가치보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삶의 의무가 더 우선시됐던 시대였다. 수직적인 성공 지향적 경쟁사회에서 아버지는 공부하라는 소리를 끊이지 않고 하셨다. 결과적으로 아버지는 어머니가 갖는 수평적 친밀감을 갖지 못했고 ‘로맨스 빠빠’처럼 환대받지 못했다. 핵가족화, 가족의 해체, 개인주의의 사회에서 근대사의 주역이었던 우리들의 아버지들은 점점 외로워져 갔다.
보다 넓은 공간을 주고 싶다며 작은 새장이 아니라 지하창고 한 방에 새를 키우고, 수족관에 금붕어를 살뜰히 살피고, 개를 무척 귀여워하시고, 자식들에겐 공부하라며 원격조정 장난감 자동차를 뺏어가지고는 안방에서 몰래 해보시며, 아이같이 웃고 계시던 내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의 아버지도 ‘로맨스 빠빠’를 꿈꾸셨을 것이다. 하지만 일만 열심히 하던 아버지는 어떻게 사셔야 할지를 모르는 듯했다. 무엇을 꼭 해야만 하는 의무감만 습관처럼 남아있다.
가끔 쌈 채소를 키워 내게 갖다 주시는데 옥상의 텃밭 가꾸는 일을 제외하고는 지금도 사무실에 나가 소일을 하신다. 며칠 전에는 지하 창고에 맡겨둔 내 그림들을 잘 정리해두었으니 염려 말라는 전화를 주셨다. 아버지는 계속 일을 하신다. 일이 없으시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분이다. 이제는 아버지가 고단했던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청년시절 보셨을 그 영화처럼 진짜 ‘로맨스 빠빠’가 되길 바랄 뿐이다. 아빠 고마워요, 우리들의 ‘로맨스 빠빠’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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