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사유를 담고 있는 문학 작품을 학생들과 함께 읽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무겁고 진지해져 버렸다. 눈물을 글썽이는 아이들이 많았다. 어렵게 입을 떼는 학생들도 있었다. 괜한 주제였나 후회가 되었다. 자살과 같은 민감한 사안을 에둘러 말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상식적이고 건전하게 죽음을 이야기하자니 어딘가 부족하였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죽기 전에 속옷을 구입한 노파 이야기를 했다. 중병에 걸린 할머니가 죽은 후에 자신의 낡은 속옷 보이기가 부끄러워 병상에서 자식들에게 꽃무늬 레이스 속옷을 사다 줄 것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아이들이 빙긋이 웃으며 공감했다. 나 자신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그것이 낡은 속옷보다 더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잇단 사고 때문인지 요즘은 어떤 죽음에 대해 공동의 책임감을 갖는 것에 대해 생각 중이다. 공감과 책임이야말로 오늘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슬픔에 다가서서 함께 아파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만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다. 정말 아픈 사람들은 동물의 소리를 내거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그 슬픔에 구체적인 목소리를 달아주는 일은 짐을 얹어주는 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떤 의미로도 환원되지 않는 좌절과 분노 앞에서 말은 무력하기 짝이 없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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